폐사지 탐방3

위풍당당한 禪의 본찰 -굴산사지(堀山寺地)

강릉에서 남서쪽으로 6km 떨어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지. 옛날부터 ‘놀기 좋은 곳은 성산, 살기 좋은 곳은 학산’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풍요가 넘치던 마을이다. 굴산사지는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학산천을 사이에 두고 좌우의 평탄한 대지에 전국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는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4~5천 평에 걸쳐 사방에 방대하게 흩어져 있다.

1936년 홍수로 여섯 개의 주춧돌이 노출되었을 때 ‘문굴산사(門堀山寺)’라는 기왓장이 발견되어 이 절이 ‘굴산사’임이 밝혀졌다. 일대에 민가가 들어서 있고 밭으로 경작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사역의 범위를 알 수 없었으나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로 긴급 발굴 과정에서 사역의 범위와 유구의 보존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총 3개의 문화층 중에서 수해로 일부 유실되었지만, 초기의 것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으며, 법당지, 승방지, 회랑지, 탑지 등도 확인되었다. 

한 때 2백여 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쌀을 한 번 씻으면 그 물이 동해에 까지 이르렀다는 굴산사지. 그 규모와 교세(敎勢)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은 초입에 있는 높이 5.4 미터의 당간지주이다. 당간지주는 옛날 당간(둥근 막대기)에 당(깃발)을 달아 이곳이 사굴산문의 영역이고 오늘은 어떤 법회가 열리는지를 멀리에서도 볼 수 있게 내걸었던 것이다. 당간은 없어지고 그를 지지했던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으나 보통 당간이 지주의 서너 배가 된다고 보면 굴산사지의 당간은 10층 건물의 높이는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학이 키운 아이, 범일국사

이 거대한 불사를 일으켰던 사람은 누구이며 이 절은 왜 폐허로 남게 되었을까?

굴산사는 신라 문성왕 9년 (847년)에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사상적 지주였던 불교는 통일 전에는 교종의 5교로, 통일 후에는 선종의 9산으로 변모하였다. 5교는 경전을 중시하던 교종으로 계율종, 법상종, 열반종, 법성종, 화엄종의 다섯 종파요, 9산은 좌선과 수양을 중시하던 선종으로 가지산, 실상산, 사굴산, 동리산, 사자산, 성주산, 희양산, 봉림산, 수미산의 아홉 선문이다. 그 가운데 강원도 지방에서만 제 1문인 가지산파와 제3문인 사굴산파가 선풍을 드날렸다. .

사굴산파(寐塗山派)를 창시한 사람이 바로 범일 국사였으며 영동지방 선(禪)의 진원처를 만들었다. 사굴산파는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으며 법맥(法脈)이 가장 융성했던 산문이었다.

범일 국사는 강릉 일대에서는 신격화된 존재로 강릉단오제에서 ‘대관령국사 서낭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속명은 김품일(金品日), 시효는 통효대사(通曉大師)이다.

범일 국사의 어머니 문씨가 처녀 때에 석천(石泉)이란 돌 우물에 물을 길러 갔다가 그 우물에 햇무리가 선 것을 바가지로 그 물을 마시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처녀의 몸으로 아비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수치심에 처녀는 마을의 뒷산 학바위에 아이를 갖다 버렸다. 그러나 죄책감에 다음날 가보니 뜻밖에도 학과 짐승들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아이를 돌보았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고 아이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데려다 키웠는데 이 아이가 바로 범일 국사라는 것이다.

범일 국사는 20세에 되어서는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대 지식인이 그러했듯이 새 시대에 걸맞는 사상을 찾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그 곳에서 마조도일의 제자인 제안(齊安)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제안은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리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다"라고 하였다.

 844년에 당나라의 무종(武宗)이 불교를 박해하는 법난(法難)이 일어나자 산속에 숨어서 지내다가 귀국, 847년 굴산사를 창건하였다.  굴산사는 명주군왕 김주원 일파의 후원을 받아 크게 선풍을 떨쳤다. 이후 그는 여기서 40여 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때 신라의 경문왕·헌강왕·정강왕이 차례로 국사(國師)로 받들어 그를 경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계속 굴산사에 머물렀다.  정쟁으로 어지러운 중앙정치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범일국사는  수도자의 본분에 대해서 "부처의 뒤를 따르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깨달음도 따르지 말라.  앞뒤 사람을 바라보고 돌아볼 것도, 더 이상 닦고 얻을 바도 없는 본래 부처로서 철두철미한 자기 본분의 자각을 수행의 목표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889년 5월 1일 향년 80세, 승랍 60세를 일기로 굴산사에서 입적하였다. 

사굴산파의 세력 보이는 웅장한 당간지주

굴산사가 폐사된 연대는 확실치 않다. 굴산사는 고려시대에는 지방호족들의 지원 하에 번성한 후 조선 초 이후의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 이후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광종과 성종 시기에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왕권 강화 정책에 의해 신복사와 함께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국내 최대의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제86호), 범일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굴산사지 부도(보물 제85호), 굴산사지 석불좌상(강원도문화재자료 제38호) 등을 통해 당시 번창했던 사찰의 품격을 잘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없는 석불과 초석, 범일국사 탄생 설화가 전하는 석천(石泉)등이 남아 있다.

당간지주는 사원의 영역을 나타내기 위해 절 마당에 배의 돛대와 같이 높은 장대를 세웠고

당간의 끝에는 깃발인 당을 달아 놓았다. 굴산사지 초입에 있는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높이가 5.4m이고 두 지주의 간격은 40cm로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현재 밑 부분이 묻혀 있어 지주사이의 깃대받침이나 기단 등의 구조를 확인할 수가 없다. 두 지주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구멍은 상·하 두 군데에 있고, 정상은 끝이 뾰족한 형상이며, 남쪽 지주의 끝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전반적으로 소박하나 규모가 거대하여 웅장한 조형미를 보인다.

한편 굴산사지 부도는 마을의 북쪽 뒷동산에서 마을 전체를 굽어보고 있다. 범일 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보이고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체의 구조와 조각 수법이 매우 정교하다. 모든 부재가 8각을 기본으로 하여 조성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변형된 수법을 보인다. 

또 이곳에는 보호각에 석불이 보관되어 있는데 누군가가 일부러 얼굴을 망쳐 놓아 얼굴의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손 모양을 봤을 때 지권인이라고 하여 통상 비로자나불이 취하고 있는 손 모양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머리에 큰 보관을 쓰고 있는 것이 이 불상의 특징이다.

여러 차례의 홍수 때문에 범일 국사의 탄생 설화가 전하는 석천은 현재 매몰되어 군데군데 돌덩이만 쌓여있는 상태고, 굴산사지 전체는 방대한 농경지로 변해 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깃발로 표시하는 돌기둥인데

국내 최대규모여서 굴산사의 예전 규모를 짐작케한다.

굴산사지 부도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부재가 8각을 기본으로 하여 조성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변형된 수법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