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원각사 대한불교조계종 원각사

 
홈 > 참여마당 > 공지사항
 
작성일 : 17-04-29 15:31
인도 성지순례 사진

2017년 1월 2일, 15일의 일정으로 원각사 인도순례단 23명이 공항을 떠나 늦은 밤 뉴델리 공항에 도착하였다. 

크기변환1.2일.뉴델리.JPG

크기변환2.2일.뉴델리1.JPG

 

2일. 인디아게이트, 델리국립박물관, 마투라박물관

인도 수도인 뉴델리의 중심부에 있는 인디아게이트,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등을 둘러보고, 델리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크기변환3.2.인디아게이트2.JPG

 

델리 국립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아쇼카왕의 <대마애법칙>을 관람하고, 이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크기변환4.뉴델리국립박물관.JPG

 

델리 국립박물관에서 인더스문명의 유물을 보고, 불교관에 들러 산치대탑에서 출토된 몇몇 유물과 바루후트 탑의 유물을 통해 무불상시대의 불교 조각의 예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피푸라하와에서 출토된 부처님 사리함과 사리를 친견하였다. 이 사리함은 1898년 영국 고고학자 펩페가 발굴한 것으로, 사리함에 (이것은 석가모니부처님 사리로, 그의 형제, 자매, 친척들이 모신 것이다)고 명문이 쓰여 있다.

크기변환6..jpg
이어 마투라로 먼 길을 떠나 마투라박물관을 찾았다. 간다라불상과 그 시원을 갖이하는 마투라불상의 대표적 유물이 이곳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변환7.마투라박물관.JPG

 

 특히 (보살명 여래좌상)의 경우 마투라불상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붓디슈왈(Buddhishwar) 출토 <434년명불입상>

- 대좌에 굽타 기원 115(434)이라는 명문 = 굽타불상 양식 편년 기준을 마련한 자료.

크기변환8..jpg

마투라적 전통과 간다라식을 수용, 두 양식을 조화, 새로운 양식으로 승화시킨 작품.


크기변환9..JPG

 

3일 일정
어제 늦은 밤 영국이 인도를 침공하기 전 인도 무갈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에 도착하였다.
아침6시에 일어나 무갈제국의 왕성 아그라성을 방문, 무갈 건축양식의 보고인 아그라성 곳곳의 대리석 건축과 붉은색 사임 건축물을 보고 감탄하였다.

 

크기변환11.아그라성.jpg

이어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타즈마할을 방문하였다. 샤 쟈한 황제가 22년에 걸쳐 2만명의 인력을 동원해 만든 아내 몸 타즈의 무덤으로, 흰 대리석 사이 사이에 보석으로 문양을 감입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타즈 마할 참배 후 밤9시에 럭나우에 도착해 숙소에 들었다.

크기변환12.타즈마할.JPG

 

4일 일정
4시에 기상, 5시에 럭나우에서 기원정사로 출발하였다.
10시경에 기원정사에 도착, 먼저 부처님께 기원정사를 보시한 급고독장자의 집터와, 앙굴리마라 스투파를 둘러 보았다.
이어 기원정사,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신 곳에 앉아 같이 금강경을 독송하고 각자의 염원을 빌었다.

크기변환13.기원정사1.JPG

 

크기변환14..jpg
 그리고 한국 사찰 천축선원과, 최근 중앙승가대 교수 보각스님이 인도에 설립한 보광초등학교를 방문해 약간의 성금을 전달하였다.

점심공양 후 천불 화현의 터를 지나, 카필라성으로 떠났다. 밤 8시경. UP주 지방장관의 관저였던 호텔에 머물렀다.

크기변환15.천축선원.JPG

 

5일. 가필라성 참배, 네팔 국경 통과, 룸비니 참배           

(1) 피푸라하와 창배 --
피프라하와는 인도와 네팔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석가족의 왕궁터가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 탑을 보수하던 중 부처님 시리함이 발견되었다. 사리함 뚜껑에는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 사리르, 그의 형제 자매가 모신 것이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사리와 사리함은 뉴델리 국립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크기변환16.카빌라성.JPG

 

 (2) 룸비니동산 참배---
인도 국경의 출입국 관리소가 있는 (소나울리)를 통해 네팔의 룸비니동산을 참배하였다. 몇년 전, 대규모의 발굴을 통해 서력기원 이전의 표지석이 발굴되었다. 현재 마야부인당 안에 위치한 것으로, 고타마 싣달타가 태어난 바로 그 장소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마야부인당 을 나와 아쇼카석주를 참배하고, 같이 자리에 앉아 기도를 올렸다. 아쇼카석주는 부처님 열반 후 100여년을 지난 당시 마가다국의 황제 아쇼카대왕이 이곳을 찾아 세운 것으로, 석주에 브라흐미 문자로 다음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 백성들은 세금 1/8을 감면한다. 이곳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등

크기변환17.룸비니.JPG

크기변환18.룸비니.jpg

6일. (1) 쿠시나가르 열반당 참배, (2) 케샤리야 스투파 참배

  (1) 쿠시나가르 열반당 참배,
6시에 기상하여, 이침 공양 후 쿠시나가르 열반당을 참배하였다. 부처님께서 45년간 설법 후 열반에 드신 곳이다. 두 그루의 사라나무 사이에서 머리는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을 향한 채 열반에 드셨다고 전한다.
열반에 드시기 전 (세상은 끝없이 변한다.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말씀과 함께 (자신 마음의 등불을, 법의 등불울 밝힐 것)을 당부하신 채 열반에 드셨다.

크기변환19.열반당.JPG

크기변환20.열반당.jpg

 

열반당에 이어 부처님 다비식이 행혀진 곳에 조성된 불탑을 3바퀴 도는 탑돌이를 행하였다.
이어 케샤리야로 향하였다.

크기변환21.다비장.JPG

크기변환22..JPG

 

(2) 케샤리야 스투파 참배
케샤리야는 바이샬리에서 쿠시나가르에로 가는 중간 쯤에 위치하는 곳이다.
바이샬리에서 부처님께세 죽음을 예고하시자, 바이샬리의 릿챠비족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라 열반의 길을 따라왔고, 부처님께서 릿챠비족 사람들에게 바루를 건네주고 그들을 돌려 보냈다고 한다.
이 탑은 릿챠비족이 받은 발우를 봉안해 세운 탑으로 추정된다.  

크기변환23.케사리아.JPG

크기변환24..JPG

 스투파 하단부의 길이가 230M 정도에 이르는 대규모 불탑이다. 아직 발굴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이다.

크기변환24-1.6일.케사리아스투파.JPG

크기변환25..jpg

7일.(1) 바이샬리 스투파, 대림정사터, 아쇼카석주

(1) 바이샬리 스투파, 대림정사터, 아쇼카석주.
어제 바이샬리에 도착해 숙식 후. 이른 아침 바이샬리에 건립된 스투파를 참배하였다. 현재는 기단부만 남은 상태의 소규모 유적으로, 이곳에서 피프라하와 탑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사리함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이곳 출토의 사리함은 인접한, 비하르주의 수도인 파트나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크기변환26.대림정사.JPG

크기변환27..JPG

 

스투파 참배 후 대림정사 터를 찾았다. 이곳에는 아난존자의 시리탑이 거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아쇼카 석주 역시 원형 그태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또한 그 옆에 있는 원앙봉밀의 터 등을 통해 부처님 당시의 여러 일화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크기변환28.바이샬리.JPG

크기변환29..jpg

 

8일 (1) 라즈기르(왕사성), 나란다대학 등. (2) 영축산 참배

(1) 라즈기르(왕사성), 나란다대학 등.
바이샬리를 떠나 라즈기르(왕사성)에로 향했다. 가는 도중 옛날 아쇼카왕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파트나(파탈리푸트라)를 거치게 되는데, 그 사이에는 갠지스강이 흐르고, 그 위에 건설된 총길이 21km나 되는 다리를 건넜다.(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이곳을 배를 타고 건너셨다고 한다.)

 
라즈기르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놓고나서 나란다대학 터로 향했다.

크기변환30.나란다.JPG

 

A.D.2세기경(150년경) 중관사상을 체계화한 용수보살이 학장으로 재직했던 곳으로, 기록에 의하면 10여명의 신라 스님들이 유학했던 곳으로, 당시 1만명의 힉승들이 이곳에 머물며 공부했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스님이 공부했던 곳으로,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신라의 혜초스님이 이곳에서 공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동서 10km, 남북 2km의 유적지가 발굴된 상태이다. 아마 당시 세계 최대의 대학이었을 것이다.
이곳 유적지를 둘러보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크기변환31..JPG

 

(2) 영축산 참배
나란다대학에 이어 영축산을 참배하였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산 정상부 여래께서 머물던 여래향실 옆에 독수리 모양의 봉우리가 있는 까닭에 영축산이라 불렀다.
부처님께서 이곳에 머물 때, 빔비시라왕은 매일 부처님을 참배하고 공양 올렸으며, 그때의 참배 길은 (빔비사라 왕의 길)이라 이름한 채 남아 있다. 이 길을 걸어 정상부 여래향실에 올라, 석양의 태양 빛을 보며 단체로 목탁을 치며 기도를 올렸다. 이어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크기변환32.영축산.JPG

크기변환33..JPG

크기변환34..JPG

크기변환35..JPG


크기변환36..JPG

 

9일 (1) 죽림정사, 칠엽굴 참배. (2) 전정각산 참배

 (1) 죽림정사, 칠엽굴 참배.
이른 아침 공양을 마치고, 죽림정사를 찾았다. 마가다국의 왕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과 비구들을 위해 건립한 불교 최초의 사원으로, 부처님께 귀의한 가섭3형제와 그들의 제자 등 1000명과, 아지타 케사캄발리의 제자였다가 부처님 제자가 된 사리불과 목건련 등 250명, 이렇듯 1,250명 비구들이 이곳에 모여 살며 불교 교단의 초기 모습을 형성한 곳이다.
이곳에서 마하가섭이 부처님 제자가 되며, 빔비사라 왕과 위제희 왕비는 부처님을 극진히 모셨다. 죽림정사 옆에는 온천이 있어, 경전에는 부처님과 제자 스님들, 그리고 빔비시라왕 등이 자주 이곳을 찾은 기록 등이 발견된다. 현재는 인도의 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노천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크기변환37.죽림정사.jpg

 

다음으로 온천 옆 바이바르 언덕을 올라 (칠엽굴)을 방문하였다. 불교 경전 1차결집(경전의 정헝화)이 행해진 곳이다. 마하가섭의주재하에 500명의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이 모여 암송본 경전을 정형화한 것으로, samgiti(합송) 과정을 통해 경전이 마련되고, 이후 문자 기록 전까지 이를 암송하여 경전이 구전되었다.

크기변환38.칠엽굴.JPG

 

칠엽굴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산에서 내려와 부처님 성도지 보드가야로 향하였다.

크기변환39..JPG

 

(2) 전정각산 참배
왕사성을 떠나 2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가야에 도착하였다. (가야)는 힌두교의 중요성지로, 배화교가 성행하던 곳이기도 하다. 부처님 당시 배화교도였던 가섭3형제는 부처님의 신통력에 감화되었고, 그들 제자 1,000명의 무리와 함께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고 경전은 전한다.
가야에 도착해, 먼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 머물렀다는 전정각산에 올랐다. 달라이 라마의 칼라챠크라 법회에 참석한 티벳 불자들로 인해 산 아래부터 차며,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뒷사람 등에 떠밀려 저절로 산 중턱에까지 이른 지경이었다.
중턱 티벳사원에 이르렀다. 사원 옆에는 부처님께서 보드가야 금강보좌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기 전에 머물렀다는 동굴이 있다. 부처님께서 동굴을 떠나려 하자 동굴에 머물던 동굴 주인 용뫙은 이쉬운 마음에 그링자라도 남기고 떠날 것을 간청하였고, 부처님께서 그림자를 남기고 간 까닭에 이 굴은 유영굴이라 불리게 된 곳이다. 대당서역기 기록에 의하면 현장스님은 이곳에서 부처님 그림자를 친견했다고도 한다.
사림이 많아 접근이 어려운 까닭에 멀리서 친견한 채 전정각산을 내려오기로 하였다.
전정각산에서 내려와 숙소에서 점심 공양을 마치고, 부처님 깨달음의 장소인 보드가야의 Maha Bodhi Temple로 향하였다.

 

9일 (3) 보드가야 대탑 참배, 금강보좌, 보리수           

 (3) 보드가야 대탑 참배, 금강보좌, 보리수
보드가야에 도착해 먼저 숙소에서 공양을 마치고 보드가야대탑을 찾았다. 최초 B.C. 250년경 아쇼캬왕이 건립한 사원으로, 5세기경에 높이 52m에 이르는 현재의 모습대로 증축된 것이라 추정된다.
대탑 뒷쪽에는 보리수나무기 심겨져 있다. 원래의 보리수나무는 6세기경 이교도에 의해 잘려나갔으며, 현재 심어져 있는 보리수는 스리링카 아누라다푸라 사원에 심어진(보드가야 보리수나무의 묘목을 옮겨심은 것) 어린 묘옥을 옮겨 심은 것으로, 1876년 또다시 잘려나간 뒤 옆의 어린 묘목이 성장해 헌재 남아 있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금강보좌 앞에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께서 금강보좌에서 내려와 첫발을 디딘 곳에 불족적이 조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대탑 안에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순례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대탑 창배 후, 겨우 자리잡은 금강보좌 측면에 앉아 한동안 기도 올리고 내일을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오는 길에 티벳인들이 운영하는 상점에 들러 염주 등을 구입하였다.

크기변환40..jpg

 

10일 (1) 수자타마을 참배. (2) 보드가야 대탑, 금강보좌 재 참배

 (1) 수자타마을 참배.
오전에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이어 점심 공양 후 오토릭샤를 타고 수자타 마을로 향했다. 이전에는 강 북쪽에서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린 채 30분 정도를 걸어갔던 길인데, 그 사이 다리가 놓여 쉽게 오토릭샤로 건널 수 있었다.
릭샤에서 내려 곧바로 수자타마을에 도착하였다.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서 아라라 카라마 선인을 만나 무소유처의 선정에 이르는 방법을 터득하고, 또다시 라지기르(왕사성)에서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를 만나 비상비비상처 선정에 이르는 방법을 배워 그 선정에 이르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진정한 해탈의 상태가 아님을 알게 된 부처님께서는 라즈기르를 떠나 이곳 가야 지방으로 오시게 된다. 당시 가야 지방의 남쪽, 니련선하 강 남쪽에는 고행림(Tapovana)이라 불리는 대규모 수행처가 존재하였고, 당시 2만명에 이르는 수행자들이 이곳을 찾아 나름의 방식대로 해탈을 구하던 곳이라 한다.
고타마 싯달타와 석가족 출신의 다섯 수행자는 바크로베(Bakrove) 마을. 즉 수자타마을 인근 고행림에서 당시의 전통적 수햅법에 의거해 6년간 고행을 하였고, 그의 몸은 여위어가 손으로 배를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고, 그의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간 채 뺨에는 가죽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모습을 조각한 고행상이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에 모셔 있어 당시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렇듯 고행을 행하던 싯달타에게 하늘 천녀들이 나타나 <리라의 선을 너무 팽팽히 당기지 말라, 선을 너무 팽팽히 당기면 그 선은 끊어지게 될지도 모를 일. 그렇다고 선을 너무 느슨하게 하지도 말라, 너무 느슨하면 노래 소리는 울려나지 않을 것이니…>라는 노래를 불렀고, 싯달타는 천녀들의 노래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곧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엄격한 고행을 쫒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안락과 고행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어 심기 일전한 채 강물에 목욕을 마친 싯달타에게 마을 성주의 딸 수자타가 유미죽을 공양올렸다. 한동안 이를 받아 먹은 싯탈타의 몸에는 32상의 상호가 다시 생겨났고, 이런 모습을 지켜본 석가족 다섯 수행자들은 <싯달타는 타락하였다>는 말을 남긴 채 바라나시 녹야원으로 길을 떠났다고 한다.
그들을 떠나 보낸 싯달타는 고행림을 벗어나 인근의 전전각산에 머물다, 이어 보드가야에 이르러 깊은 선정에 잠긴 채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의 <수자타의 공양>과, 열반에 이르기 전의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께 대한 대표적 공양으로 인식되었다.
이를 기념이라도 하듯, 수자타마을 동쪽에는 수자타쿠티(Sujatakuti)라 불리는 고대 스투파의 유적이 남아 있다. 전탑 형태의 것으로, 발굴된 모습은 상당히 양호한 상태이다.

 

 (2) 보드가야 대탑, 금강보좌 재 참배
수자타마을을 벗어나, 다시 보드가야 대탑, 금강보좌가 있는 보리수나무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 목탁을 치며 7번의 천수다라니 독송과 정근, 그리고 침묵 속에서의 기도를 마치고, 무칠린다 용왕못과 아쇼카석주 등을 참배하였다.
보드가야 인근에는 약 1만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머물고 있는 상태였다. 무척 혼잡한 가운데,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 모습이다.이날 한국 순례객만 해도 100명 이상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대탑 안에도 자리를 마련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가득 모여 참선과 독경, 기도에 열중인 모습들이다.
이어 보드가야 대탑을 나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11일 바라나시 도착, 갠지스강 화장장 관망

바라나시 도착, 갠지스강 화장장 관망.
아침 5시 30분 기상, 6시 30분 공양을 마치고 바라나시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간에 점심 공양을 하고, 2시 40분 경에 바라니시의 호텔에 도착하였다.
4시에 다시 모여 릭샤를 타고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크기변환41.바라나시.jpg

 

30분 정도 릭샤를 타고 도착한 갠지스강 인근의 가트 입구. 혼잡한 골목을 지나 갠지스강에서 배를 타고 염원의 등불을 강물에 흘려 보내고, 배 안에서 갠지스강 화장장의 모습을 관망하였다.

크기변환42.릭샤.jpg

 

이곳 갠지스강이 흐르는 곳, 바라나시는 힌두교의 중요 성지 중 하나로 인식되는 곳이다. 인생의 황혼녁에 이르면 누구나 이곳 강물에 몸을 씻어 전생의 죄업을 씻어버리고, 화장을 마친 후 그 뼈를 갠지스강 강물에 흩뿌려지기를 염원하는 인도사람들. 그래서 이곳 갠지스상 가트 인근에는 죽음을 앞둔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들고, 이곳에서 힌두교도들은 죽음을 맞기를 소망한다.

크기변환43..jpg

 

화장장의 모습을 한참 바라본 후, 배를 돌려 갠지스강 건너편의 모래언덕에 다다랐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갠지스강의 모래 수 만큼의 갠지스강>을 떠올리며, 정태춘의 노래 <북한강에서>를 들었다. <강물 속에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가득 흘러가고 있음>을 말하는 가사는 이곳 갠지스강 흐름과 맞물려 감동을 주는 노래이다.

긴 시간 갠지스강에 머물다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였다.

44..jpg

 

12일 (1) 사르나트 녹야원. 사르나트 박물관 (2) 산치 행 야간열차           

(1) 사르나트 녹야원. 사르나트 박물관
아침 7시 공양 후 녹야원으로 향했다. 깨달음 얻으신 부처님께서 최초 5비구에게 법을 설했다는 초전법륜지이다. 녹야원에 이르기 전, 처음5비구와 만난 장소에 건립된 챠우칸디 스투파를 지났다.

크기변환45..jpg

 

녹야원 유적지에 입장해, 먼저 아쇼카석주를 둘러 보았다. 교단 분열을 야기한 자는 흰옷을 입혜 교단에서 쫒아 보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당시의 교단 분열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크기변환46..JPG

 

이어 최초 아쇼카왕이 세운 후, 굽타시대에 증축된 것으로알려진 다메크 스투파를 둘러 보았다.규모의 장대함과 섬세함을 볼 수 있었다.
스투파 주변에 모여 목탁을 치며 기도를 올렸다.

크기변환47..jpg


크기변환48..jpg

 

유적지에서 나와 사르나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마투라 불상을 대표할 수 있는 2점의 거대 입상을 양옆에 둔 채 중앙에는 원래 녹야원 아쇼카석주 윗부분에 놓여 있었던 4사자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4사자상은 인도 국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왼쪽 전시실에는 나형의 모습에 관능적 느낌을 주는 굽타후기의 사르나트 제작 불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르나트 제작 불상에서는 좀처럼 미적 감수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안쪽에는 사르나트제작 불상의 대표작이라 할 초전법륜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호텔로 향했다.

  

크기변환49..JPG

 

(2) 산치 행 야간열차
호텔에서 점심 후, 바라나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4시 출발의 야간열차를 타고 산치역에 도착한 시간은 다음날 아침 8시.
무려 16시간이나 걸린 오랜 기차 여행이었다. 색다른 경험이었으나 밤사이 너무 추워 감기에 걸린 사람들이 있었다.

 

13일 산치대탑 참배
아침 8시경 산치에 도착해 산치대탑을 참배하였다.

크기변환50.JPG

 

아쇼카왕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스투파는 기단부와 복발부, 평두와 산개를 온전히 갖춘 당대 스투파의 전형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크기변환51.jpg

 

특히 네군데에 조성된 입구와 난간의 조각들은 무불상시대의 조각 양식 뿐만이 아니라, 부처님 본생담 및 팔상도의 초기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각 문 입구에 표현된 집장야차며 지만약차 등은 (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에 묘사된 초기 불화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으로 표현해 낸 점이 이채로웠다.

크기변환52.JPG

 


특히 아쇼카왕의 불탑 순례 장면과, 라마그라하 스투파의 용왕 수호 장면 등이 현실감 있게 모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세등분되어 놓여진 아쇼카석주 및 주변 유적을 둘러본 후 다음 여정을 위해 5시긴 버스를 달려 인도르에로 이동하였다. 내일은 3시 30분에 기상하여 아잔타로 이동, 아잔타 석굴사원을 탐방하기로 되어 있다.

크기변환53..JPG

 

14일 아잔타 석굴사원 참배

아잔타 석굴사원은 그 주위를 흐르고 있는 와고라(Waghora) 강의 흐름으로 인해 형성된 높이 76m에 이르는 반원형의 침식단애(浸蝕斷崖) 사이에 조성되어, 그 서쪽 입구로부터 1에서 29까지의 일련번호를 붙여 각각의 유적을 구분하고 있다.

9세기 이래 폐허로 묻혀버린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1919년 일이다.

1819년 봄, 마드라스에 주둔하고 있던 죤 스미스(John Smith)라 불리우는 젊은 영국인 장교가 호랑이 사냥을 하던 중 이곳 밀림에 묻힌 아잔타 석굴사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크기변환54.아잔타.jpg

크기변환55..JPG

크기변환56..JPG

크기변환57..JPG

 

15일 엘로라 동굴사원 참배

 

크기변환58.엘로라.JPG

 

엘로라 석굴사원에 가면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마치 아파트 한 동 전체를 석굴로 파 사원을 조성한 예가 여럿 발견되기도 한다.

크기변환59.JPG


크기변환60.JPG

크기변환6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