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과 납일

정각스님 | 논설위원·고양 원각사 주지

  옛부터 10월 상달[上月]은 한해를 마감하는 때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한해 농사를 마치고 수확한 벼[禾]를 창고에 쌓아둠으로써 1년을 마감했음은 역사(歷史)의 역(歷)자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역(歷)이란 글자는 ‘돌출된 바위의 비탈진 언덕’ 즉 한(厂) 아래 수확한 벼[禾]를 차곡차곡 쌓음을 마무리한다[止]는 말로, 추수로써 한해 역사를 마감한 농경시대의 관념이 작용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추수로써 한해 역사를 마무리한 민가에서는 상달 말날[午日]에 가신(家神)을 모신 터주[其主], 성주단지에 곡식을 갈아 넣어 안방 시렁 위에 모시고 다음 한해를 기약하기도 하였다.

  터주는 제석오가리라 불리는 바, 수미산 세계를 관장하는 도리천의 왕 제석(帝釋)은 한해의 마침인 제석(除夕)과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이능화의 <조선신사지>에 “불사(佛寺)에서 제석일(除夕日)이면 사중(寺衆)들이 재미(齋米)를 들고 미고(米庫)에 가서 제석신(帝釋神)을 위안한다.

  석제환인위(釋提桓因位) 위패 아래 승(僧)들은 삼배를 하고 미고(米庫)에 쌀을 납고(納庫)시킨다. 원일(元日)로부터 별좌(別座)가 조석으로 재(齋)를 올릴 때 먼저 석제환인위(釋提桓因位)에 삼배를 행한 후 그 쌀로 밥을 짓는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한편 ‘밥을 먹다가 밥풀을 흘리면 그것을 주워 먹을 때까지 제석신이 흘린 밥풀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속담은 미곡(米穀)의 신(神) 제석신이 조왕(竈王)과 대체된 모습을 보이는 바, 제석신은 인간 한해의 역사 뿐만이 아닌, 집안 대소사와 관련맺고 있음을 말해주는 예라 하겠다.

  또한 『동국세시기』에 “보은 지방 풍속에 속리산 꼭대기에 대자재천왕(大自在天王) 사당이 세워져 있고, 그 신이 매년 10월 인일(寅日)에 법주사(法住寺)에 내려온다. 이때 산(山) 사람들은 음률을 연주하고 신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제 10월 상달도 저물고 있다. 머지않아 섣달 그믐, 제석(除夕) 납일(臘日)이 찾아오고, ‘승려의 한해’인 ‘납(臘)’과 함께 세납이며 법랍이 더해갈 즈음, 스스로 삶의 역사적 의미를 돌이켜 보아야 할 때가 오는 것 같다.

[불교신문 2770호/ 11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