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스님 / 논설위원·경북 문화재위원

전륜성왕(轉輪聖王)이기를 포기한 싯타르타, 고타마 붓다의 정신을 우리는 알고 있다. 출가 후, 제국의 반을 주겠다는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의 제의를 물리친 싯타르타는 마가다국의 무력을 배경으로 코살라국에 대한 자민족 해방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포기한다. 그는 깨달음에 이른 후에도 수많은 샤카족 왕자들을 출가시킴으로서 자민족 통솔력 약화와 함께, 숙업(宿業)의 논리로써 코살라국에 의한 민족의 멸망에 직면한다. 고타마 붓다는 자민족이란 소국주의(小國主義)적 관점을 멀리한 채, ‘다르마에 의한 통치’를 염원하는 전륜성왕 아닌 법왕(法王)이기를 자부했던 것이다.

전륜성왕 보다는 ‘법왕’을

그럼에도 한국불교의 금시대적 상황 속에 수많은 감흥들은 승가 스스로가 전륜성왕의 현신이거나 적어도 그 후원자이기를 자원하는 듯 보인다. 마치 데바닷타가 아사세 태자에게 제의한 바와 같이, 새로운 왕과 새로운 종교지도자가 결탁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고자 했던 망상에 동의하는 듯하다. 그래서 1987년 10월 ‘노태우 후보 당선 기념법회’를 열기도 한 과거의 권승(勸僧)들은 권력에 아부하는 데바닷다의 길을 걷기도 했다.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삼국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선봉적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이었다. 왕실에 의해 불교가 강력히 지지.발전한 것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계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 불교가 적합한 때문이었다. 즉 ‘하나의 불법에 귀의하는 신도의 관념은 하나의 왕을 받드는 신민(臣民)’으로 인식되었던 추세 속에 중국 북방불교가 유입된 것으로, 이곳에 호국불교의 이념이 싹트기도 하였다.

이차돈의 순교, 황룡사 9층탑 건립 등은 호국의 이념 속에 등장하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 불법 흥륜(興輪)의 챠크라바르틴(cakravartin), 전륜성왕이기를 자부한 법흥(法興)왕이 등장하였다. 진흥(眞興)왕은 아쇼카왕이 조성하지 못한 석가 삼존상을 조성하는 인연 있는 나라의 전륜왕임을 자부한 채 황룡사 장육존상을 조성, 그들 모두는 사문(沙門)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리고 여산 혜원(慧遠)의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강조했던 가운데 승가는 사회 속에 스스로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도 하였다.

1948년 5월, 승려 최범술 및 유성갑의 제헌 국회의원 당선. 1950년 5월, 승려 이종도와 허영호, 박성우 등이 2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승가는 전륜성왕의 길로 나서기도 했던 바, 그럼에도 세속 통치자 전륜성왕이기를 거부한 과거 고타마 붓다는 숙업의 결과로서 자신 나라의 패망마저 말없이 지켜본 채, 세속 정치와 결별한 무국주의(無國主義)의 법왕이기를 주장했었다.

‘호국불교의 망령’은 고타마 붓다의 무국주의 정신과 위배된다. 고려조 몽고 침입에 대한 승장(僧將)들의 활동으로부터 서산과 유정의 승병(僧兵) 운동.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란 호를 수여받은 승병장 서산(西山)과, 일본의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만나고 ‘가의대부행용양위대호군’이란 호를 하사 받은 유정(惟政)의 이념 속에 깃든 호국불교의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탈피해야 한다.

자비 없는 호국은 피해야

물론 사회적 기반 위에 형성된 종교는 사회적 요구와 유리되기 힘들다. 고려대장경 조판사업은 당시 집권자가 민중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책략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우리는 세속 권력과 야합한, 적어도 그에 부합하려 했던 종교적 실체 내지 칼을 들고 타의 생명을 죽였던 무자비적 세태의 양상은 피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신문 2635호/ 6월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