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그 아지랑이 피는 계절에

정각스님

  I. 아지랑이에 사랑을

  언제나 3월은 나에게 풋풋한 대지의 흙 내음과 더불어 찾아온다. 그리하여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의 흩날림은 움츠렸던 가슴에 또 다시 내일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다 줄 것인가.

  지난날 떨어지는 낙엽의 외로운 가을을 몽상하면서, 그리고 겨울의 몇몇 추위들을 접하면서 더욱 더 악착스러운 감정으로 나의 살아있음을 확인코자 하였던 때, 그러나 이제 내 생명의 확인을 위한 시기는 지났다. 그리하여 아지랑이는 나의 귀밑에 다가와 인사를 한다. 코끝이 간지럽게도, 안녕!

  II. 어둔 동면의 밤을 지나

  아지랑이 다가오는 봄에 우울함을 생각할 수 있는가? 어둔 밤 지나 찾아온 새벽에…

  기나긴 동면의 밤을 지나 무수한 벌레들은 기지개 펴고, 경칩(擎蟄)이 되면 '개구리 세수하는 날'. 땅속에서 지새운 개구리 아지랑이에 놀라 또다시 땅에 숨어도 따스한 바람만은 엄연한 현실로 다가와 있다.

  다가오는 봄에는 아지랑이와 더불어 훈훈한 바람을 맞아야 할 것. 그리하여 태양과 그 황도(皇圖) 위에는 춘분(春分)이 다가와 더 이상 밤과 낮이 다르지 않음을 말할 적에 계절의 조화로움에 우리는 나아간 채 침묵을 배워야 한다.

  나아간다는 의미. 그렇다, 3월(영:March, 독:Marz)은 로마의 군신(軍神) Mars(火星을 의미하기도 함)에 바쳐진 달. 그 단어적 의미 조차에 행진을, 나아감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순간 속에 정주(定住)코자 하는 형이상학적 욕구를 지닌다' 할지라도, 떠나야 할 때를 알고서 떠나는 이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III. 중화절(中和節)을 맞아서

  이제 태음력의 절기로는 2월이 되어 음력 1일 중화절(中和節)을 기점으로 여러 세시행사가 펼쳐지게 된다. 옛부터 중화절이란 농사철이 시작되는 때를 일컬어왔으며, 『열양세시기』 및 『경도잡지』 등에 의하면 임금은 이 날 붉은 색 참나무 등으로 중화척(中和尺)이란 '자[尺]'를 만들어 재상과 시종들에게 나누어준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이 날 중화척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한 해의 정사를 자로 계량하듯 분명히 하라는 말로서, 이것은 중국의 창조신화 '반고<盤古>'의 설화에 얽힌 또 다른 변형이 아닌가 생각된다. 몇 년 전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돈황의 유적 발굴품들 중 오따니 탐험대의 '오따니 콜렉션' 가운데 '반고와 여와'의 그림을 접한 적이 있는데, 여와의 오른손에 자<尺>가 들려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를 『황금가지』의 저자 프레이저 식으로 해석하자면 이 때의 창조자는 우사<雨師, rain maker>와 동격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위지동이전』의 「부여전<夫餘傳>」에 나오는 우사<雨師>로서의 왕의 성격은 종교적 사제자로서 그 모습을 보여 이 모두가 제정일치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동국세시기』에 전하는 바, 민가에서는 이 날을 머슴날(또는 하리아드랫날)이라 하여 송편을 만들게 되는데, 종들에게 나이 수만큼의 송편을 먹게 하며 이 날을 기점으로 농가에서는 바쁜 농사일이 시작되게 된다.(이 때의 떡을 '나이 떡'이라 하며, 한편 이 날은 20세 된 머슴이 다른 머슴들에게 한턱 내어 자기도 어엿한 성인이 되었음을 고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성인의 날에 해당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시작되는 농가의 바쁜 일손들. 그래서 육당 최남선은 『고려사』의 「협법지」를 인용해 '이 날은 설날의 일부로서 그 종막에 달하는 날'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가정에서는 이 날 콩을 볶아 먹는다. "달달 볶아라, 콩을 볶아라, 새알도 볶고, 쥐 알도 볶아라…" 하고 노래한다.('달달 볶는다'는 말은 못살게 군다는 식으로 전이되어 현재 우리 구어<口語>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달달 볶으면 쥐도 새도 다 귀찮아서 도망갈 것이 아닌가(?) 하는 주술적 상징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 즉 언어의 비유적 상징이다.) 이 날 콩을 볶는 것은 이 의식을 통해 새와 쥐들이('쥐도 새도 모르게…',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등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쥐·새라 함은 그것을 포함한 모두에 해당, 모든 해로운 짐승들이란 표현으로 알아듣는 것이 좋다) 없어져 곡식 축냄을 방지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여하튼 그럼에도 이 날이 오면 아이들은 즐겁다. 여자아이들은 노란 콩 볶아 긴 머리카락에 하나씩 하나씩 치렁치렁 매달며, 남자아이들은 누이의 머리치장을 돕는 한편 한(많음, 가득) 궤츰 콩을 넣고서 양지바른 곳 마을의 놀이터거나 논두렁을 거닐며, 그것을 논밭에 던지는 놀이를 하게 된다.(이것은 논밭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IV. 꽃샘바람 추위에

  음력 2월 말, 3월초의 바람은 매섭다. 그 바람은 갓 추위에서 풀려진 우리 피부 깊숙이 스며들며, 이에 사람들은 말한다. "설을 거꾸로 쇤 것 같애" 라거나 "2월 바람에 쇠뿔 오그라진다…"고.

  이것을 흔히 '꽃샘추위'라 말하는데, 2월 말 3월초의 꽃필 무렵에는 무척이나 바람이 불어 이 꽃샘바람은 달리 화투연(花妬娟)이라 불리기도 한다. 꽃을 시샘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시샘바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우리의 민속에 영등신(靈登神)이라 불리는 바람신[風神]이 있어, 특히 음력 2월은 바람이 잦아 '영등달'이라 표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영등신, 영등할머니는 2월 1일에 하늘에서 내려와 2월 20일에 올라간다는 일시적 내방객, 손님에 해당되어(일시적 내방객은 손님이다. 또한 손님은 우두·천연두·마마이다. 독일어에서도 Gast는 손님과 천연두를 동시에 뜻하며, 손님은 곱게 보내야 탈이 생기지 않는다. 즉 마마 자국이 생기지 않는다. 이 손님 영등할머니를 곱게 보내기 위해 우리는 영등굿을 베푼다.) 만약 이 할머니[女神] 내려올 때 딸을 데리고 오면 예쁜 딸 다홍치마에 나부껴 예쁜 바람 오래 부나 그 해는 흉년이 든다고 하고, 며느리와 함께 올 때면 그 며느리가 바람과 함께 비를 몰고 와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여하튼 음력 2월이면 이 바람신[風神]에 제사 지내는 영등굿이 베풀어진다. 바람 불어 좋지 않은 달, 한달 동안 어부들은 배 타기를 삼가고 해녀들 또한 자맥질을 금하게 된다.

  V. 경칩(驚蟄)에 이르러

  한편 음력 2월 6일 저녁이 찾아들면 사람들은 어둔 밤 언덕에 올라 한해 농사를 예고하는 농사 점을 친다.

  28성수(二十八星宿) 중 묘성(昴星)에 해당하는 작은 별들의 무리 '좀생이별'을 바라보며 점을 치는 것인데, 『동국세시기』에는 이 별을 삼성(參星)이라 하여 '초저녁 삼성이 달 앞에서 고삐 끌듯 멀리 있으면 풍년이 들 징조'라 말하고 있다. 또한 『열양세시기』 기록을 보면 친절하게도 '이것은 오랜 세월 경험에 의하여 제법 맞기도 하다[驗之頗中]'고 부언하기까지 하고 있다.(이와 달리 음력 20일에는 날씨로써 점을 치게 되는데, '이날 비가 오면 풍년이 들고 조금 흐려도 길하다'고 『동국세시기』는 적고 있다.)

  이제 더 며칠이 지나 경칩(驚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소주를 가지고 산과 들로 나선다. 산 녘, 들녘 물가에 널려진 개구리 알을 주워 먹는 것인데 이것을 '경칩 주워먹기' 또는 '경칩 먹으러 간다'고 표현하여 이 개구리 알은 허리 아픈 사람에게 특히 좋은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이 행사는 春分 전까지 계속된다. 개구리 알이거나 도롱뇽 알 등 동면을 하거나 협거하는 동물들을 먹게 됨은, 항상 차고 기울며 不老不死를 되풀이하는 달과 같이 동면의 밤을 지난 이들의 생명을 먹게 됨으로써 不死의 혼이 우리 몸에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주술적 요소와 관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두꺼비·뱀·토끼·곰·개구리·멧돼지 등 동면 또는 협거 동물을 달 동물 lunar animal이라 부르고 있다.)

  "2월은 중춘(仲春)이라, 경칩·춘분(春分) 절기로다…"

  「농가월령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제 농사는 시작된다. 이제부터 우리의 농가는 바쁘다. 봄보리 농사와 두엄내기, 객토 넣기, 봄 배추, 감자, 옥수수, 푸성귀 등의 씨를 뿌리기에 정신 없는 농부들… 이때의 농가 풍경을 "눈코 뜰 새 없다"고 표현한 것일까?

  VI. 석존의 출가(出家)와 열반일(涅槃日)에

  이렇듯 바쁜 농가의 3월, 그 씨뿌리는 농부의 뼈아픈 땀에서 인간 삶의 고(苦)를 자각한 것일까? 인간 삶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낀 고타마 싯타르타, 그는 카필라성과 태자로서의 지위를 버린 채 출가(음력 2월 8일은 석존 출가일) 사문(沙門)이 된다. 그리하여 뼈저린 고행을 거쳐 고통과 쾌락의 적절한 조화로부터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은 인간 석가모니는 이후 45년이란 전법기간을 거친 후 인간의 육신을 벗게 되는 것이다.(음력 2월 15일은 석존 열반일).

  출가와 전법, 그리고 열반으로 이어진 붇다의 전 생애 기록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따라 행하며, 무엇을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러나 허망된 이론과 망상·분별은 중요치 않다. 이 모든 삶의 여정을 따라 행했던, 행하고자 했던 한 인간의 표본이 쉽게 우리 앞에 발견될 수 있으므로…

  만해 한용운 스님. 사실 그는 우리 민족의 암흑기에 거대한 횃불이 되어 타올랐던 민족의 등불이었다. 그의 삶의 역사성 속에서 우리는 승가(僧伽)의 역사성의 모델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은 또한 우리 삶의 또 다른 지표 설정을 가능케 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VII. 또다시 3·1절에

  '중생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중략>…나는 해 저문 들판에서 돌아가는 길 잃고 헤매는 어린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만해 한용운 스님, 「님의 침묵」 '군말' 중에서 -

  본적 : 충남 홍성군 읍내. 41세.
  승적 :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신흥사
  현주소 : 동성부 규동 43번지
              …<중략>…

  문 : 그대가 손병희 외 31인과 조선독립을 할 선언서를 비밀리 배포한 목적과 동기는 무엇인가?

  답 : 본년 1월 27일∼28일 경 나는 최린과 만나…<중략>…구주전쟁도 끝났고 강화회담을 체결하기까지에 이르렀으며, 기타 식민지에서는 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자유독립을 하려고 하니 이 때 독립할 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인원으로는 목적을 달하기 어려우니 다수의 동지를 얻는데 같이 힘쓰자고 말한 후 작별하였다…<후략>…

      - 「3·1운동의 역사」, 한용운 <경찰 심문조서> 중에서 -

  VIII. 사족

  아, 이 모든 것이 3월에는 생각난다. 봄의 난초와 가을의 국화는 각각 특색이 있어 버릴 수 없는 것[春蘭秋菊俱不可廢]…

1990년 통도사 월간지 <등불>에 실었던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