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을 넘어 이월로

정각스님 · 원각사 주지

  I. 산녘 초막에서는

  동지(冬至)가 지나 노루 꼬리만큼씩 길어지는 햇살.

  더해가는 햇살 그림자 안고서 꽁꽁 언 논두렁 밑에 썰매 즐기는 아이들, 짤막한 막대기엔 끈 매달아 팽이를 치고 있노라면, 어느덧 길어진 해 조차 서산(西山) 황혼 녘에 이르른다.

  호! 호! 불며 손을 부비는 아이들, 오른 어깨에 썰매 걸쳐 메고 집을 향하는 아이들, 머리 위에는 이미 희미한 달빛 찾아와 있다. 들녘 오솔길, 앙상한 가지 드러낸 채 듬성듬성 서 있는 포푸라 나무, 그 위에 얹혀진 까치집에도 은은한 달빛 비춰질 때면 먼 산녘 초막에서는 멋들어진 피리소리 들려옴직도 한 일이다.

  II. 호롱불 지새우는 농가에서도

  호롱불 밝혀든 농가의 저녁은 정겹다. 행랑 저만치에서는 베틀이며 새끼 꼬아 짚신 삼고, 이 건너 사랑방 질그릇 화롯가에는 엄마 치마폭 끌어 잡고 「승경도(陞卿圖)놀이(옛날 사대부 집안 아이들의 주사위 놀음으로, 판에는 각종 관직과 학업의 진행이 그려져 있어 국가 관직의 상하를 이해시키고 그로 인해 아이들의 공명심을 돋우는데 효과가 있었다)」에 정신없는 아이들, 그리고 훈훈한 적막감.

  이제 잠에 겨운 아이들 머리맡에서 엄마는 나지막한 이야기 들려준다. 엄마가 어려서 듣던 이야기, 할머니 어려서 듣던 이야기들‥‥

  "옛날, 오랜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때의 일이란다. 마을에 아주 무서운 호랑이 한 마리 살고 있었는데‥‥" 이렇듯 시작되는 「곶감 이야기」는 언제나 즐겁고 마음을 조이게 만든다. 또한 동아줄에 얽혀진 「햇님과 달님 이야기」며, 「몽달귀신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무서움 속에서도 귀를 쫑긋 세운다.

  엄마의 베개맡 이야기는 언제나 즐거웁다. 엄마의 이야기에는 우주가 있고, 엄마의 이야기에는 삶의 유익한 교훈들이 숨겨져 있다.

  III. 십이지일(十二支日) 풀이

  이제 설날과 함께 새해는 시작된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태음력(太陰曆)을 사용해 왔는데, 태음력에 의하면 설날은 새해 첫날이 될 것이고, 태양력(太陽曆)에 의한 첫날은 동짓날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척력은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으로, 이 기준으로 양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정한 것은 로마의 그레고리우스력에 영향을 받고 있다.

 한편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음력 정월 1일부터 12일까지에 걸쳐 중국 간지(干支) 관념의 영향하에 각각 일진(日辰)에 따른 행사를 치러 왔는데, 이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음력 1월 1일은 용(龍)의 날로서, 상진일(上辰日)에 해당한다. 이날 용이 아침 일찍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 알을 낳는다고 하는데, 이때 제일 먼저 샘물을 길어 밥을 지으면 그 해 농사가 대풍이 든다고 한다.

  2일, 상사일(上巳日)에는 이발을 하지 않는다.(머리카락은 귀신들 눈에 뱀처럼 보인다고 한다. 절에서는 머리카락을 방에 떨어뜨려 귀신들을 놀래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집에 뱀이 들어오는 것을 꺼려 빨래도 널지 않고 땔감을 부엌에 들이지도 않으며, 바느질도 이날은 삼가게 된다.(실은 뱀의 형상을 지을 수 있으므로‥‥) 3일 상오일(上午日)에는 '메주로 장 담그기 좋은 날'이라 하고, 상미일(上未日, 4일)은 걸음걸이 방정맞은 양의 날로 모든 일을 삼가, 배도 이날은 출항치 않으며, 이날 약을 먹으면 1년 내내 약효가 안 난다 하여 약 먹는 일도 삼가게 된다. 상신일(上申日, 5일)은 원숭이 날로 부엌에 귀신이 나올 우려가 있으니 이날은 남자가 먼저 부엌에 들어가야 한다.

  닭의 날 상유일(上酉日, 6일)에 바느질 하면 손이 닭발처럼 된다 하여 바느질을 금하고, 사람이 모이면 싸움이 생긴다 하여 좀처럼 모임을 가지지 않는다. 개의 날[上戌日, 7일]에는 풀을 쑤지 않으며(이날 풀을 쑤면 개가 잘 토한다) 돼지날[上亥日, 8일]에는 팥을 갈아 가루로 세수하면 얼굴이 희어진다 하고, 이날 머리를 빗으면 풍기(風氣)가 생긴다 하여 삼가고 있다. 또한 상자일(上子日, 9일)은 쥐의 날로 쥐불놀이를 하며(이 불을 「달맞이 불」이라 불러, 논밭의 병충해 제거 및 거름을 만드는 이중의 효과가 있다), 이날 주머니를 만들어 차면 1년 내내 재수가 있다고도 한다.

  상축일(上丑日, 10일)은 소의 날이다. 이날은 소를 일시키지 않는다. 집안 곡식을 퍼내면 소에게 재앙이 온다 하여 금하기도 한다. 음력 11일 상인일(上寅日)은 호랑이 날이다. 발음상 유사성 때문에 사람의 날[上人日]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날 일하면 호랑이가 나타난다 해서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12일은 상묘일(上卯日, 토끼의 날)로 이날 여자가 대문을 열면 불길하다. 또한 이날 실을 짜거나 옷을 지어 입으면 장수한다 하여, 이날 짠 실을 흔히 토사(　絲 - 톳실)라 부르게 된다.

  참으로 많은 풍속이 얽혀져 있는 기간이다. 첨가하자면 조상들은 입춘 후 첫번째 해일(亥日)에 산신제(山神祭)를 지냈으며, 소의 날에는 조상신에게, 말의 날에는 서낭신, 돼지의 날에는 지신(地神), 뱀의 날에는 업구렁이 신, 호랑이 날에는 산신에게, 개의 날에는 허공을 떠도는 중음신(中陰神)을 위해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한편 정월 7일에는 칠성불공을 드려, 칠성각(七星閣)에 모여 사람들은 자손 번성을, 수명 장수를 기원한다.

  IV. 정월 대보름 행사

  이러한 잠시 점차 커져간 달은 정월 15일에 이르러 만월을 이룬다. 정월 대보름, 우리 세시풍속에 제일 뜻깊은 날이 다가온 것이다. 이날이 되면 갖가지 행사가 펼쳐지게 된다. 그 이전부터 아이들은 「망울이」라 하여 깡통에 불을 담아 빙빙 돌리는 놀이를 하며(「망울이」란 '대보름 달[月]을 기다린다[望]'는 망월<望月>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날 불을 지피기 위해 동네 판자집 담벽들은 도대체 남아나지를 않는다.(이날의 쥐불놀이 역시 「달맞이 불」이라 불린다.)

  옛부터 정월 보름은 상원(上元)이라 불리웠다. 이날은 1년 중 첫 보름달이 뜨는 날로, 7월 15일의 중원(中元, 백중)이나 10월 15일의 하원(下元, 추석)보다도 중요시 해왔다. 첫 보름달이 뜨는 시간을 기준으로 대지의 풍요를 비는 동제(洞祭)가 행해지며, 풍년을 기원하는 줄다리기 및 소경 무당을 불러 집안 평온을 위해 『안택경(安宅經)』을 읽으며,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이른 새벽부터 날밤이나 호두·은행·무 등을 깨물어 12달의 무사태평과 종기·부스럼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부럼(부스럼의 한글식 준말로, 창<瘡>병이 없기를 기원하는 주술적 행사)」 의식이 거행되고, 12개 다리를 밟으면 12달 액(厄)을 면할 수 있다 하여 「다리[　]밟기」가 성행(다리<脚>가 튼튼해지기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하기도 했다.

  데우지 않은 청주 한잔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 하여 「귀밝이술」이라 하였고, 나뭇가지 사이에 돌멩이 하나 얹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나무 시집보내기」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주먹같이 열려라. 다닥다닥 열려라‥‥"

  한편, 이날은 「까마귀에 제사지내는 날」이라 하여 찰밥에 대추·밤·기름·꿀·간장 등을 섞어 약밥을 만들어 먹는데, 약밥 중 일부는 나물과 함께 담 위에 놓여져 까마귀 밥이 된다.

  이에 덧붙여 「지신밟기」, 「마당 밟기」, 「걸립(乞粒)」, 「더위팔기」, 「개 보름 쇠기」 등 다채로운 풍속이 가미되기도 한다. 특히 「모깃불 넘기」란 것이 있는데, 저녁 마당에 짚불을 놓아 아이들이 그 위를 세 번 뛰어넘으면 여름 내 모기를 피할 수 있으며, 몸에 또한 좋다고 한다.(어렸을 적 짚을 구하기 어려울 때면 엄마는 종종 신문지 조각이라도 태워 그 위를 넘게끔 했다.) 이날의 재미있는 또 하나의 행사가 있다. 자기 키만큼 실을 잘라 실에 나이 수만큼의 매듭을 만드는데, 그것에 콧김을 쐬어 공중에 매달아 아래서부터 불을 당기는 것이다. 이 불이 꺼지지 않고 다 타들어 가야만 그 해 운수가 좋다고 말한다.

  한편 「제웅치기」란 것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에 따라 그 운명을 맡는 9종류 별의 액(厄)에 걸리게 되는데, 그것을 직성(直星)이라 하여 일정 의식을 통해 '직성의 액을 풀어야' 한 해 운수가 형통케 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 "직성이 풀린다"는 표현을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웅치기」 의식에서 비롯된 말인 것이다.(「제웅치기」 의식은 액에 걸린 사람이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쌀과 나이 수만큼의 동전을 안에 넣은 다음 직성이 든 사람의 생년·월·시를 적어 대보름 전날 초저녁 길가에 버리면 그것을 줍는 이에게 액이 옮아간다는 일종의 주술로, 어렸을 적 다래끼에 걸리면 눈썹 하나를 뽑아 돌멩이 밑에 놓아 그 돌멩이를 걷어차는 사람에게 다래끼가 옮아간다고 생각했던 바와 동일한 것이다. 남자는 10·19·28·37·46·55·64세에, 여자는 11·20·29·38·47·56·65세에 직성이 든다고 한다.)

  이렇듯 예에서 볼 때 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인 동시에 모든 부정과 사악함을 일소해 버리는 정화의 상징을 함께 가진다고 할 수 있어, 이것은 우리민족의 기본 정서[한(白), 　]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족으로, 16일은 「귀신 날」이라 불리워 바깥출입을 삼가야 하며, 어떤 일이든지 하지 않음이 통례로 되어 있다. 남자가 이날 일하면 1년 내내 우환이 찾아들고, 여자가 일하면 과부가 된다는 통설이 있기 때문이다.

  V. 입춘(立春)에 이르러

  「농가월령가」 '정월령'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월은 맹춘(孟春)이라 입춘(立春)·우수(雨水) 절기로다‥‥"

  입춘이란 태양력을 기준한 24절기 중 첫 절기에 해당된다. 우리는 흔히 "철이 들었다", "철을 안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그것은 24절기 각 철에 맞춰 모든 사리판단을 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24절기의 첫 철인 입춘(立春)에 이르러 어떤 행사가 있는 것일까?

  입춘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둥이나 문설주에 「입춘 방」을 써 붙이는 일이다. 새봄을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입춘 방」은 막 철든 아이의 글씨로 쓰여지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또는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아아나 사바하"란 『부모은중경』 가운데 진언(眞言)을 써 붙이기도 한다.

  한편, 우리는 「신구간(新舊間)」이란 특별한 기간에 맞닥뜨리게 된다. 「신구간」이란 대한(大寒) 후 5일부터 입춘 전 3일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주변에는 조왕신(　王神)을 비롯한 집안 여러 신(神)들이 있어 그 신들 모두가 이 기간이 되면 하늘 천제(天帝) 전에 회의 차 출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신들의 부재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어떤 전승에 의하면 12월 23일 조왕신(　王神)이 승천해 옥황상제 앞에서 각 가정의 1년간 선악을 보고하며, 이에 따른 상벌을 내린다 하여 아부하는 뜻에서, 또 입에 달라붙어 나쁜 일을 말하지 못하게끔 조왕단(　王壇)에 엿을 바치는 풍습이 있기도 하다.(이사할 때 연탄불·화로를 제일 먼저 옮긴다던가 성냥·초를 사가는 풍습, 「조왕중발」을 모시는 일 등은 모두 이런 관념이 작용한 것으로, 또한 이것은 경신일<庚申日>과 연계성을 갖기도 한다.)

  이렇듯 신(神)들의 부재기간 - 이 기간이 지나면 각 가정에 새로 발령된 신들이 찾아오게 된다 - 벽에 못 하나 치는 것조차 삼갔던 가정에서는 이 기간 동안 집을 고치거나 또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거나 하게 된다.

  VI. 경신일(庚申日)이란?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경신일이란 무엇인가? 일진(日辰)에 따르면 경신(庚申)이란 육십갑자(六十甲子) 중 57번째에 해당되는 날을 말한다.

  도가(道家)와 승가(僧家)의 전승으로, 사람 몸에는 시충(尸蟲)이라 불리는 세 마리 벌레[三尸蟲]가 있는데, 경신일 밤 사람이 자고 있는 틈에 그 벌레들이 하늘에 올라 하늘 제석천에게 그 사람의 죄를 고해 바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이날 자지 않고 지샘으로써 자기 몸의 삼시충(三尸蟲)을 지키는 풍습을 수경신(守庚申)이라 하며, 이러한 뜻이 담겨 있는 날을 경신일이라 부르는 것이다.

  VII. 해제를 맞이하며

   이러는 사이, 승가에서는 음력 1월 15일의 동안거 해제(解制)를 맞이한다. 깊은 산 침묵의 안거처(安居處)에도 봄의 여명이 서리었단 말인가? 그래서 이날을 기다리며 걸망을 몇 번씩 쌌다 풀었다 하는 심정들. 그러나 해제(解制)가 기나긴 동면의 밤을 지난 근원적 새벽[元曉]을 의미한다면, 새벽에 떠오르는 달조차 일천강(一千江)을 비추는 묘한 도리를 생각한 채 한낮 태양[佛日]의 드넓은 광명[普照]을 우리는 찾아 나서야 할 것인가? 그리하여 서녘 산[西山] 능성이에 걸린 낙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하기도‥‥

  여하튼 대동강물 풀린다는 우수(雨水) 지난 산녘을 걷고 걸으며, 만해(卍海) 한용운 스님의 시 한편 읊조리는 먼 나그네의 얼굴에서, 그러나 어떠한 표정도 우리는 읽을 수 없다.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解脫)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 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

             - 만해 한용운 스님, 「꿈이라면」 중에서 -

1990년 통도사 월간지 <등불>에 실었던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