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며 길을 묻던 사람이

                    정각스님 · 원각사 주지

  I.
  만남이 우리들 삶의 이정표라면, 그 만남은 우리 마음 속 어느 공간에 위치하는가.
  우연(偶然)이 삶의 길 곳곳에 존재한다 말한들, 어느 시간에 우연은 하나의 필연이 되어 또 다른 구획을 정하여 줄 것인가.
  한때는 오직 역사(歷史) 속에 잠긴 채 오로지 나의 길을 가리라 말했었는데, 삶의 길, 슬픔의 길에서 참다운 애수(哀愁)만을 느끼길 바랬었는데, 이제 '승차권을 가진 승객만이 침묵할 수 있다'라는 기이한 명제는 오직 나에게 하나의 두려움만을 가져다 줄 뿐이었다.  언제나 스스로 폐쇄적이며 주위에 대한 개방성만을 요구하였듯이, 나 아닌 남이 나의 수단으로 강구될 순 있어도 나의 목적으로 남아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II.
  세상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는 나의 길 위를 걷는 한 영혼을 만나게 된다.  침묵은 고요 속에 있었고, 또다시 침묵은 어제의 회상을 자아내었다.  그러나 어제란 오늘의 추억이며, 내일이란 오늘의 꿈인 것을      어제란 삶의 그림자이며, 내일은 이지러진 삶의 현실인 것을    
  여행자!  그럼에도 왼쪽 그림자의 죽음을 돌이켜 세운 이들에겐 여행이, 삶의 방랑이 시작된다.  생활이란 의미 앞에 모든 것이 소멸되어짐을 느낀 채, 자신의 존재 소멸되어질 두려움 마저 안고서 길을 가는 인간.
  길을 걷는 나그네는 길에서 길을 만난다.  무수한 방황의 끝, 그 막바지 길에 마주한 인간은 길에서 길의 의미를 묻는다.
  간혹, 길을 묻는 그 사람은 우리들 삶의 동반자가 된다.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자리만큼의 자리를 양보한다.
  옆자리.  나의 존재 멀찍이 내다볼 수 있는, 그곳에 앉은 사람은 허망한 나의 실체를 몽상한다.  그는 묻는다.  '그대 진실로 원하고 있는가, 나의 길을    '

  III.
  이제, 시간이 흐르면 무엇인가를 느껴야 하는 만큼의 나의 고독의 시간도 흘러간다.  목적을 위한 수단은 수단을 위한 목적으로 습성화되어지고, 배리(裵裏)적인 속에서 또다시 방황하기를 즐겨하고, 스스로의 인간적인 의미를 넘어선 새로운 의미를 설정하고, 나아간다는 의미 자체에 희열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저 체념도 아닌, 그렇다고 나아감의 의미조차 띄지 못한 채 정주하는 애욕자(愛慾者).  하나의 옷을 벗어버리게 될 때 그만큼 나는 커질 것이라는 사념만을 허공에 그리며 하나의 사실만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IV.
  나는 희망하고 있는가.  그러나 나만큼의 기쁨은 이제 얼굴 주변의 경직으로 굳어져버리고, 나의 바램은 공중의 말뚝에 묶여진 채 하루가 간다.  그럼에도 또다시 희망을 희망하고, 자신 운명만큼의 슬픔 속에서 울부짖는 여행자.
  수단을 위한 프로메테우스, 그게 그일 수 있느냐 하지만 나는 순간을 포착하여 주저앉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삶이란 침묵(沈默)과 부동(不動) 속에서 세 번 증언하는 것이라면, 이제 조용한 시간에는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V.
  이제 가을, 아마 8월도 지나면 온 천지 청량함 덮혀올지라도, 나의 길에 선 나는 나의 길을 위한 옆자리를 마련해 보아야 한다.

                 "일곱 걸음 함께 걸은 이는 벗이요
                열 두 걸음 함께 걸은 이는 친한 벗이요
                  한 달이나 반달을 함께 있으면 친족이요
                  그보다 이상이면 자신과 같거니"
                                             - 쟈타카 -

  아, 어찌 사막에서만이 인간은 실존(實存)의 체험(體驗)을 마련해 가질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