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현상적 질서를 찾아서

정각스님 · 원각사 주지

   I. 5월, 사념(思念)의 응시자가 되어

  어제도 공중에 지워지는 동그라미 긋고, 오늘을 사는 공허함 속의 인간들. 한줌 어치도 안 되는 자신 모습을 무수히 반추해 갈 것이지만, 분명 인간은 하나의 진실을 찾을 때까지 침묵해야 합니다.

  운명 만큼의 슬픔을 간직하지 않기 위해, 모든 사념 스쳐가는 봄에도 우리는 분명 침묵 가운데 무언가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침묵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 배리감(裵裏感)을 뒤엎는 조용한 혁명입니다. 그리하여 '침묵(沈默)과 부동(不動) 속에서 인간은 세 번 증언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무수한 침묵. 그럼에도 인간은 그 속에서 조차 또 다른 삶의 질서를 몽상해 보기도 합니다. 차라리 숙명(宿命)의 공허함에 지친 인간은 또 다른 유형의 진실을 찾아 자신 존재가치를 확인코자 할 것이라면, 인간은 삶의 질서 속에 놓여진 색다른 우회로를 만들어 갖게 됩니다. 곧 인간사 속에 스스로 침몰해버림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II. 「밥」, 총체적 인간사의 기저

  거듭과 거듭을 되풀이하는 인간사(人間事). 그 인간사의 근원 속에 우리는 두 가지의 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라틴어(Latin)의 '존재함'을 뜻하는 'sum'이란 단어가 말하듯, 인간 생존의 근원은 '숨(sum)을 내쉰다'는 고차적 질서 속에 주어져 있기도 할 것입니다. 한자 단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숨(息)을 내쉰다'는 것은 '스스로[自]의 마음[心]을 반추해 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끝없는 인간사. 그 순환의 고리 속에서 인간사의 근원을 탐구하는 또 다른 평범한 인간은 밥(飯)이라 불리는 인간 원초적 원리의 근저에 다다르게도 됩니다. 이에 앞의 것을 '인간 삶의 존재적 질서'라 말할 수 있다면, 뒤의 것은 '인간 삶의 현상적 질서'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 대부분은 이 '밥을 먹는다'는 현상적 차원에 머물며 살아갑니다.

  '밥을 먹는다' 함은 인간 생명운동의 기저(基底)를 뜻하게 됩니다. 식구(食口)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 공동체의 원초적 전제 역시 한솥밥 먹고 살아가는 구성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歷史)의 의미 역시 '밥 먹기 위한' 벼이삭[禾]을 언덕[丘] 아래 쌓아둠을 마쳤음[止]을 기록하고 있는 한, '밥을 먹는다'라 함은 가정사(家庭事) 및 총체적 인간사(人間事)의 기본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III. 친(親)·효(孝)의 방정식

  특이하게도, 이처럼 '밥을 먹는다'는 인간 삶의 현상적 질서 속에서 우리는 효(孝)와 더불어 친(親)의 개념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박한 동양사상의 기저에 잠긴 글자의 의미. 친(親)과 효(孝)를 이야기함에 앞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한 토막을 들어 그 각각의 글자 속에 긷든 의미성을 파악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외딴 마을 외딴 곳, 한 아들과 노모(老母)가 살고 있는 집. 마침 시골 장날이 되어 아들은 어머니께 드릴 식량을 마련코자 먼길을 걸어 마을 장에 이르게 됩니다. 저녁 해질 무렵 어둠이 깔려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걱정스런 마음에 집 옆에 심어진 높은 나무[木]에 올라서[立] 마을 어귀를 향해 아들 돌아오기만을 걱정스레 바라보게[見] 됩니다.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이같은 걱정과 염려. 높은 나무[木]에 올라서[立] 아들 돌아오기만을 바라보는[見] 애타는 마음, 조바심. 이것이 합해(木+立+見) 모친(母親)·부친(父親)의 친(親)이란 글자가 만들어졌다고 할 때, 동양 사상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자식된 도리로서 효(孝)의 개념을 등장시켜 놓기도 합니다.

  효(孝)를 설명하기에 앞서 우리는 '늙을, 어른 대접할 로(老)'자의 글자 구조를 분석해야 합니다. 이 글자는 '늙은이 로(로)' 변에 '숟가락 비(匕)' 자(字)가 합해 만들어진 것으로, 늙은이에게 숟가락, 곧 밥을 올린다는 의미로서 '어른 대접할 로(老)' 자(字)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 로(老) 자는 효(孝) 자와 모양 자체가 엇비슷하게 되어 있습니다. 늙은이에게 숟가락, 곧 밥을 올리는 숟가락(匕)을 아들(子)이 대신하고 있는 모습으로, 이 속에서 우리는 동양적 의미의 '친(親)·효(孝)의 방정식'을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방정식은 등정식(等程式)을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등정식의 진행, 일상사의 나아감 속에 우리 인간의 역사(歷史) 역시 진행됨을 우리는 깨닫게도 됩니다.

  IV. 불교적 효(孝)의 원리

  불교 경전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효순공양(孝順供養)이란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효도로서 부모를 섬겨야 한다는 말인 바, 결국 효(孝)라 함은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맺어주는 끈인 동시에 끝없는 삶의 윤회 속에 내재하는 인간 원초적 생명운동의 질서라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이에 잠시 경전 『장아함경(長阿含經)』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남의 자식된 사람은 마땅히 다섯 가지 일로써 부모를 존경하여 모셔야 한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 의식(衣食)을 받드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음이다. 둘째는, 모든 하는 일을 먼저 부모에게 고(告)함이다. 셋째는, 부모의 하는 일에 공손히 따라 거스르지 않음이다. 넷째는, 부모의 바른 생활방법을 감히 어기지 않음이다. 다섯째는, 부모가 하는 바른 행위를 끊지 않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