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25편의 원고, <책머리에>부터 <에필로그>까지는 1988년부터 여러 잡지의 청탁에 따라 썼던 원고를 모아 1993년 간행한 수필집 [빈곤한 자의 초상]에 실렸던 것들이다.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싣는다. 

* * *

책머리에

  I.
  본래적 의미의 무상성(無常 無償性) 속에, 그 잉여물(剩餘物)로서의 존재가 발 딛고 사는 우리 삶의 현실들. 그 삶의 무근거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부단한 자유 추구의 사념(思念) 속에 스스로의 삶의 자리를 마련해 가져야 한다. 또한 끝없는 자기창조의 시간들 속에 그 삶의 터전 또한 거듭 넘어서야 하는 자(者), 인간(人間). 그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자기애(自己愛)의 그늘 속에서 거듭 재주넘기를 계속하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 인간 정신(人間精神)이 문득 퇴락 해짐을 느낄 때, 또 다른 삶의 상황 속으로 자신 스스로를 함몰시켜 나아가고자 할 때, 그는 또 다른 세계에 위치한 자신의 모습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그 또 다른 세계, 그것은 달[月]의 세계도 또한 해[日]의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상황들 속에 펼쳐진 나의 삶의 모습인 것이다.

  II.
  또 다른 삶의 상황 속에 위치한 현재의 나[我]. 이것은 나의 삶의 기록을 동반하게 된다. 내자신의 변화 속에서, 자신에 대한 배반(背反)이며 통찰을 통한 삶의 발자취, 그러므로 그 기록 자체는 자신 삶의 그림자임을 말할 수도 있다. 이제 나는 이렇듯 나의 삶의 발자취를 엮어 나의 방 액자에 걸어 놓는다. 그 액자 속에 걸려진 나의 초상(肖像)은 간혹 서글퍼 보일 때도, 애련함조차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들이 나[我]이다.
  전체적 삶의 질서 속에서의 나의 기록. [나의 삶의 이력서]와도 같은 다음의 기록은 4개의 장(章)으로 구성이 되어진다. [제1장]은 언제나 마음에 그려왔던 땅 인도(印度)에로의 여행과, 인도에서 얻어질 수 있었던 몇몇 사념들을 묶어 '먼 자(者)에게 사랑을'이란 제목으로, [제2장]은 지나치는 삶의 현상들을 바라보는 방관자적 관점 속에서의 사념들을 모아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것이다'라는 제목을 붙여 보았다. 
  [제3장]은 승려[僧]로서 삶을 살아가며, 그 출가(出家)와 관련된 초기의 사념들을 묶어 '건너야 했던 징검다리'라는 제목을 붙여 두었다. 그리고 [제4장]은 세월의 흐름 속에 지난날을 반추하며, 그 시간 시간들의 추억과 더불어 그때 그때의 정서를 기록한 이야기들로서, '절기 이야기'라는 소제목을 붙여 보았다.
  그럼에도 이 자그마한 기록들 모두는 내 자신 삶에 대한 스스로의 사랑 및 내 자신 삶의 사념의 발자취인 까닭에 나는 이 책을 {사랑과 사념의 팡세}라 총괄적으로 이름짓는다.

  III.
  원래 이들 각 원고들은 89년부터 여러 종류의 잡지에 게재된 단편들 중의 일부로, 자신 내면의 삶과 관?것들만을 묶어둔 것이다. 자신 내면의 삶의 이야기. '내면의 새[鳥]'를 찾는 '새 사냥꾼', 아 나는 어느 또 다른 이력서를 통해 새 사냥꾼으로서의 전기(傳記)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가을이 왔다. 그 스산한 날씨 속에 나는 세고비아(A. Segovia)의 선율을 듣는다. 선율의 차가움은 가을 분위기와 걸맞고, 감동 없이 울리는 음(音)은 마음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는다.

1993년 9월 29일, 
추석을 하루 앞둔 날 밤.

속리산 법주사에서 正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