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11월

정각스님·원각사 주지

  I. 허무(虛無)의 안개 속에서

  모든 행위의 불안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득 찬 연기는 성냥불에 빛났고, 그 성냥갑 속에서는 노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11월 회색 하늘은 나에게 강한 허무(虛無)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 허무의 안개 속에 나는 『추억제』를 읽었으며, 『퓨리턴의 초상(肖像)』을 손에 들고 걸었던 혜화동 길모퉁이…

  11월 길모퉁이에서 나는 깊은 아픔을 느꼈다. 태양이 차갑고 슬프게 비춰옴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 그럼에도 그 안개는 나뿐만 아닌 모든 세계를 뒤덮고 있었다.

  II. 늦은 11월
  계절이 만들어준 파스텔화, 나는 그 안개 속을 걸었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랭보(A. Rimbaud)를 만났고, 소쉬르(F. de Saussure)의 ‘의미의 창가’에서 헤어난 나는 나의 역사성(歷史性)의 의미를 발견코자 하였다.
  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늦은 11월, 어느 산사(山寺)의 새벽으로부터… 그러나 새벽은 새벽을 이끌어 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늘도 나는 그 새벽을 바라며 계절의 파스텔화, 늦은 11월을 만난다.

  III. 그 11월에
  11월, 절기상 음력 10월의 상달에 접어들면 태양의 따스함조차 기운을 잃고 온통 대지는 옷을 벗는다. 처마 밑 제비들조차 남쪽나라로 긴 여행을 떠나고 나면 쓸쓸한 낙엽의 바람이 우리를 감싸게 되는 것이다
  이제 입동(立冬)과 함께 늦가을 지나면 추위는 서서히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이렇듯 겨울이 우리들 계절을 넘나볼 때 사람들은 ‘겨울철의 반양식’ 김장을 담그게 되는 바, 옛부터 김장은 입동 전후 3일 사이에 담그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통김치며 보쌈김치, 깍두기·동치미·겉절이·총각김치·석박지·젓국지·채김치·막김치·장김치·물김치·나막김치 등 우리의 김장은 우리 식생활의 극치를 자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10월 상달에 접어들면 사람들은 만두를 만들어 먹기 시작하였다. 두부로 소를 만들어 장국에 익혀 먹기도 하며, 또한 이때부터 가정에서는 신선로(神仙爐) 탕을 만들거나, 화로에 둘러앉아 음식과술을 익혀 먹기도 하여 이것을 난로(煖爐) 또는 난로회(煖爐會)라 부르기도 하였다.

  IV. 「우주의 춤」과 함께
  10월 상달[上月]. 이제 추수가 끝난 민가에서는 집의 가신(家神)들을 모시는 그릇에 새로운 곡식을 담게 된다. 뒤꼍 장독대 옆의 짚 주저리 단지에 곡식을 넣어 터주[基主] 또는 철륭단지라 부르며, 마루 또는 대들보나 대공에 사람 모양으로 한지를 접거나 마루 한구석에 철 따라 보리와 벼를 갈아 담아 두는 성주단지(세존단지, 제석오가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시루떡을 준비해 안방의 삼신제왕(삼신할머니)을 모시고 외양간·사랑·머슴방·나락가지·쌀 뒤지 등에 음식을 차려 가정 평화를 위한 안택(安宅)이나 고사(告祀)를 지내기도 했던 바, 이 모두는 음력 10월 15일 전후에 행해지는 시제(時祭)로서 종결되곤 하였다.
  손을 비비고 마음속으로 축원을 행하는 ‘비손’ 의식. 그 의식을 통해 우리의 어머니들은 사제자(司祭者)가 되었다. 하늘의 달을 보며 그 달과 하나가 되었고, 그 달의 권능 속에 현세적 삶의 평온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동맹(東盟)이거나 부여의 무천(舞天) 등 제천의식(祭天儀式) 역시 그러하였다. 그 속에 인간은 초자연적 질서와 하나가 되었으며 그러므로 그네들은 달을 보며, 우주와 마주하며 가무(歌舞)를 즐겼다. 우주의 춤을 추는 무용가(舞踊家), 사제자(司祭者)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5대 이상의 조상들을 모시는 제사, 시제(時祭) 및 제천의식. 음력 10월의 추수가 끝나면 모든 밭농사까지 마쳐져, 수많은 조상신께 감사의 제사를 올리고 안락한 겨우살이를 맞이하였던 우리의 어머니들. 그럼에도 「농가월령가」는 아직 말하고 있다. “부녀야, 네가 할 일 메주 쑬 일 남았구나”라고.

  V. 늦어도 11월에는
  아 이렇듯 시간이 흘러 낙엽도 지고 나면 그뿐, 소설(小雪) 지나 눈[雪] 마저 흩내릴 것이지만, ‘늦어도 11월에는’ 나의 상념 속의 수채화(水彩畵)를 발견해야 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