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과 담쟁이의 계절에

정각스님·원각사 주지

  1. 낙엽과 담쟁이의 계절

  문득 낙엽 타는 냄새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10월이 오면 앙상한 뼈대만이 남겨진 늦가을 담쟁이가 보고 싶어짐은 지난날 다사로운 추억과 더불어, 남겨진 나의 삶의 사랑과 회한의 정(情)을 회상해 보고자 함이겠는가?

  운명에 승복하여 아무런 아우성 없이 초연히 자신을 드러내야 했던 때. 바로 그 순간 나의 비극은 체념에로 인도되어진 채, 나는 삶에 부과된 나의 선택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내 자신 몰락에의 의지를 드러내었던 것인가?

  아,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나의 삶의 고독과 더불어 순간들의 선택에 만족할 수밖에 없을 따름이었다. “그처럼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의 위대성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좋다고 판단하게 만든다”는 소포클리스의 희곡 「안티고네」를 통하여 나는 나의 삶의 타협점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II. 체념의 시간도 흘러 

  아, 그 낙엽의 계절에 나는 삶의 지혜 속에서 체념을 배워갔던 것이다. 그 삶의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조차 모든 주변적 질서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러나 이제 시간이 흘러 나의 체념의 시간도 흘러갔다. 나 역시 과거의 시간 속으로 흘러가 버린 채, 나는 이제 현재의 나가 되어 현재의 계절 속에 파묻혀 있다. 그럼에도 10월의 계절 속에서 낙엽과 만나면 그 담쟁이들이 그리워지고, 그에 따라 과거의 시간들은 주마등처럼 나의 상념 속을 방문하는 것이다.

  아, 그때 나는 진정 무엇인가를 원했었던가? 내 자신 삶의 질서 속에 진정 자유를 누리고자 몸부림쳤던가?

  그럼에도 그 모든 것들은 너무도 먼 과거의 시간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살아가는 속에서, 현재의 나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III. ‘계수나무 한 나무’ 헤아리는 밤

  10월의 저녁이 오면 우리는 차가운 달[月]과 마주하곤 하였다. 그 하늘의 달을 보며, 달 속의 나를 찾기도 하였다. 

  그리고 달 속에 못 박힌 신비, 한 마리 토끼를 생각하며 ‘계수나무[桂] 한 나무’ 헤아려 보았던 밤.

  옛부터 음력 8월은 계월(桂月)이라 불리웠다. 계수나무의 달. 산마다 단풍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고, 청초한 국화의 내음 피어오름과 함께 마지막 코스모스 한 잎 떨구고 나면, 우리는 달을 바라보았다. 달 속에는 우리들 유년의 정서가 잠겨 있었다. 달이 뜨면 우리의 마음도 피어올랐고, 우리는 왠지 좋았다.

  음력 8월의 보름달 뜨면 더욱 그러하였다. 음력 8월의 보름은 ‘가위’라 불리웠다. ‘가운데’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 ‘가븐데’에 명사 첨미어가 붙어 ‘가위’라는 말이 생겨난 것인데, 그것은 가을 삼추(三秋) 중에서 중추(中秋)의 보름을 일컫는 것이었다. 또한 이날을 우리는 가배일(嘉俳日) 또는 추석(秋夕)이라 부르기도 하여, 정월 보름과 함께 우리민족 2대 명절 중의 하나에 속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IV. 추석날, 그 조화로운 풍경들

  추석(秋夕)이 오면 술집에서는 술을 빚고, 떡집에서는 햅쌀로 송편을 만들었다. 무와 호박을 섞어 시루떡을 만들고, 또한 인절미며 율단자(栗團子)·토란단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햅쌀로 빚은 술을 ‘신도주(新稻酒)’라 하며 햅쌀로 만든 송편을 ‘오려송편’이라 하여, 각각 토란국과 함께 차례(茶禮)를 올리는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일년에 두 번, 한식(寒食)과 추석 전날의 벌초(伐草). 추석날 일찍이 성묘(省墓)를 마친 마을 곳곳에서는 씨름이며 윷놀이·투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소먹이놀이·소싸움·닭싸움·거북놀이·서당 학동들의 기마 싸움 등의 놀이로 이어졌던 옛 풍경의 다사로웠음. 

  이내 저녁이 찾아들면 여인들은 높은 산에 올라 떠오르는 달에 절하였고, 남보다 먼저 달을 보면 첫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추석에 비가 내리면 흉년이 들고, 추석날 달을 보지 못하면 개구리 알을 배지 못하고, 토끼도 새끼를 배지 못하고, 메밀도 결실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던 밤.

  밤이 되면 여인들은 무리를 지어 강강술래를 놀기도 하였다. 뜰 가운데 모닥불 피워놓고 주위를 돌면, 불빛에 상기한 붉은 얼굴 속에는 발그레한 기쁨이 발견되었다. 치렁치렁 머리를 날리며 ‘진양조’에서 ‘중머리’를 거쳐 ‘중중머리’·‘자진머리’로 이어지는 흥쾌한 율동 속에, 그네들은 고된 시집살이의 노래거나 베틀가·민요 또는 즉흥적인 작사를 붙여 노래불렀다. 그리고 그 선창(先唱)에 이어지는 후렴 ‘강강술래’.

  평소 달 보며 울었던 그네들, 달과 함께 애환을 같이한 그네들의 슬픔이 이내 기쁨으로 변하는 신비가 그날 밤, 추석 달의 조화 속에 숨어 있었다.

  V. 철늦은 코스모스 아직 나부껴

  추석 지나 며칠이면 절기상 한로(寒露:찬이슬 내리는 때)가 찾아들었다.
그리고 음력 9월 9일이 되어 중구일(重九日) 찾아들면 사람들은 삼월 삼짓날의 진달래 떡과 마찬가지로 누런 국화잎을 따서 떡을 만들기도 하여 이것을 화전(花煎)이라 불렀으며, 서울 사람들은 밀가루 떡을 쪄서 서로 나눠 먹었다고도 한다. 중구일. 이날은 또한 중양절(重陽節)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양(陽)의 기수가 겹친 3월 3일·5월 5일·7월 7일도 중양(重陽)에 해당되겠지만, 옛부터 ‘중양’이라 하면 중구일(重九日)을 칭하였던 것이다.

  양(陽)의 기운이 극치에 달하여, 이제 그 양의 기운을 음(陰)에로 되돌려 주어야 하는 때. 음력 9월은 만물이 쇠퇴기에 들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시기이다. 입동(立冬)을 앞둔 찬이슬과 서리 내리고, 천지는 서서히 음(陰)으로 그 기운을 바꿔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기상 상강(霜降:서리 내리는 때)이 찾아들어 시골집 처마에 집 지어 살던 제비들 남쪽나라로 긴 여행을 떠나면, 북쪽에서는 겨울 한철을 나고자 기러기는 찾아들기도 한다. 그리고 밭에서는 목화 따기, 콩·팥·조·수수를 수확하며 무·배추 등을 수확하는 한편, 벌써 북쪽지방으로부터는 가정의 겨울 김장이 시작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직은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고, 들에 피어난 들국화. 시골길엔 철늦은 코스모스 아직 나부껴 향기 또한 흩날리면, 사람들은 서울의 남산이거나 북악산 등지를 찾아 먹고 마시며 즐긴다고 『동국세시기』는 기록하고 있다.

  VI. 사족

  그럼에도 이제 태양의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계절. 이제 우리는 길어진 해 그림자 속에 음침한 한때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온통 대지는 옷을 벗고 긴 겨울잠 준비할 것이지만, 우리는 저녁나절 그 수확의 창가에서 책 한 권 넘겨보는 여유를 가져 볼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