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스님 · 원각사 주지

  I. 새로운 계절의 정취를 느끼며

  폭염의 여름도 하루쯤의 휴식으로 오늘은 마치도 가을, 그것도 반쯤 접어든 것 같음 속에 새로운 계절의 정취를 느낀다.  찬바람이 스쳐오고, 한가히 풀을 뜯는 가을 속의 풍경인 듯 엄마 소 소리내어 운다.  찬바람과 아직은 여전히 따가운 햇살, 그 속에 정신은 맑아져 마치 풍요로운 마음의 환영(幻影)일 지도 모를 만큼이나 상쾌함을 느낀다.

  내면의 감정 솟아오면 이지적 질서는 마음 바깥으로 맴돌게 된다.  한가로이 오직 휴식의 때를 맞이하는 농부의 안식(安息)인 양, 이루지 못한 일들을 이제 조금은 덮어둔다.  그리고 순리에 순응해야 함을 배워간 채, 그럼에도 안이함 속에 만족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아닌 또 다른 질서 속에서 아직은 매어진 상태에 기쁨을 느끼게 된다.

  II. 돌들에겐 사랑이    

  저녁, 석양노을에 서면 오직 어린애의 눈으로 풀잎을 보고, 또한 어린애의 손길로는 길가 모퉁이의 돌들을 만져 본다.  자연 속의 모든 사물들은 왠지 그리 다정다감할 수가 없다.  그러자 문득 자연이란 의미가 생각나고, 지드(A. Gide)의 '쏘아나의 이단자'가 생각난다.  오직 순수함 속에서 자신 풍요로움이 느껴지고, 자신 일부를 버릴 줄 앎으로서 조그마한 자신이 채워질 수 있음을 알면, 그러면 그때 그 순수함으로 풀잎을, 그리고 길가 모퉁이의 돌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여름의 휴식과도 같이 나의 의지도 휴식을 취하면, 그 의지를 이끌어내는 모든 아집으로부터 멀리한 날....  그렇게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 불면 돌들에겐 사랑이, 풀잎 속엔 순수함 생겨나 그 모두에 오직 하나의 진실 간직됨 알게 될 적에 그 아름다움으로 나는 영원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현장의 부산함, 그럼에도 사이의 침묵 속에는 정적(靜寂)이 자리하고, 그러한 정적 속에 또 다시 삶의 현장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바탕, 그 자리가....    

  III. 절기에 따른 이야기들

  이제 매미우는 소리 잠들고 고추잠자리 온 천지 덮어 날면, 시골길 길 녘엔 철 이른 코스모스 피기 시작한다.  진홍색 꽃 이파리로부터 다홍색, 하이얀 순결의 코스모스에 이르기까지 미처 포장되지 아니한 시골길 길 녘에 놓이게 되면, 그 향내 쫓아 우리는 몽상의 길을 걷는다.  그러면 간혹 꽃잎에 고추잠자리 날아들고 하늘의 내려 쪼이는 햇볕 따갑다 해도, 그것은 이제 나의 팔목을 검게 그을리지는 못한다.

  이제 얼마쯤의 시간이 지나면 송글송글 이슬 맺혀져 내린다는 백로(白露)가 찾아온다.  나락들 한창 피어 여물고, 곧이어 추분(秋分)이 찾아들면 이제 논에는 벼이삭 누렇게 타올라 풍성한 계절, 가을을 말해 주게 된다.(여기서 가을[秋]이란 벼이삭[禾] 누렇게 타오르는[火] 듯한, 즉 禾+火의 계절을 일컫는 문자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에 앞선 백중(百衆)날.

  백중날 찾아들면 저녁의 달밤, 민가에서는 망혼일(亡魂日)이라 하여 채소며 과일, 술이며 밥 등을 차려 놓고 죽은 어버이의 혼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  또한 불가(佛家)에서는 이날(원래 백중날은 승가의 해제일에 해당한다.  곧 여름 석 달간의 안거를 마치고 자자와 포살이 행해지는 날인 것이다)을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 하여 시방의 모든 스님들을 초청, 신자들이 공양을 올리는 예식과 함께 죽은 조상들을 위한 천도(薦度)의 제사를 지내게도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에 {불설우란분경}의 부분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 비구니 국왕 태자 대신 재상 삼공(三公) 백관(百官) 만민(萬民)으로서 만일 효행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마땅히 현재의 부모, 과거 칠세(七世)의 부모를 위해 (음력) 7월 15일 부처님이 환희하는 날, 승단이 자자(自恣)를 행하는 날에 백미(百味)의 음식을 '우란분(盂蘭盆:쟁반, bana, 盆)'에 담아 시방의 자자하는 승단(僧團)에 보시하라.

  능히 이같이 하면 현재의 부모로 하여금 수명 100년에 무병(無病)하게 될 것이며, 7세 부모로 하여금 아귀도(餓鬼道)의 고통을 벗어나 인천(人天)에 태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설우란분경}의 설명은 옛 인도에서 부처님 제자였던 목련(目連) 비구가 죄를 짓고 아귀도에 떨어져 있는 어머니를 구해 내고자 많은 스님들을 초청하여 오미(五味) 백과(百果)를 갖추어 분(盆:그릇)에 넣어 시방 대덕(大德)들을 공양한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도 '중원일(中元日)에 승니(僧尼) 도사(道士) 속인(俗人)들이 이날 분(盆)을 만들어 절에 바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한편, 신라 및 고려 때에도 종종 우란분회(盂蘭盆會)를 베풀었다는 내용을 우리는 각종 역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또한 도교에서는 천상선관<天上仙官>이 1년에 3번 인간의 선악을 장부에 기록한다고 하여 그 때를 원<元>이라 부르는데, 그 각각 상원<上元>은 정월 보름에, 중원<中元>은 7월 보름에, 하원<下元>은 10월 보름에 해당되어 이날에는 모두 제사를 지내게 된다.)

  IV. 백중날의 또 다른 행사

  한편 백중날이 되면 농가에서는 몇몇 또 다른 행사가 베풀어지게 된다.  베짜기와 호미씻기가 그것이다.  곧 음력 7월 중순이 되면 농가의 한적한 틈을 이용하여 아녀자들은 베짜기를, 남자들은 호미씻기(일명 백중놀이)를 거행하는 것인데, 그 베짜기에 대해 {삼국유사(卷一, [유리이사금] 條)}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왕이 이미 6부를 정하자 이를 반씩 나누고 두 편을 만들어 왕녀 두 사람에게 각각 부(部) 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며, 그 무리를 나누어 패를 만들어서 가을 (음력) 7월 16일부터 날마다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서 길쌈을 하다가 밤늦게(2경에) 파하게 한 채,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결과가 많고 적음을 살펴 가지고 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였다.  이때 노래와 춤과 온갖 유희가 일어나는데, 이를 가배(嘉俳)라 했다.  이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하면서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 아름다워 뒷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서 노래를 지어 회소곡(會蘇曲)이라 했다.'

  이렇듯 음력 7월 중순이 되면 삼을 베고 그 껍질을 벗겨 길쌈을 시작하는 때, 이 날은 또한 머슴날이라 불리기도 하며 호미씻기 행사가 베풀어지기도 한다.  이미 논농사의 김매기가 끝나 호미를 다 썼으니 이제 그것을 씻어 보관해 둔다는 뜻으로, 이처럼의 농한기를 이용해 그간의 피로를 해소하는 호미씻기는 농부들의 휴일이며 풍년을 기원하는 농촌의례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달리 백중놀이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백중을 전후한 용날[辰日]을 택하여 머슴들이 풍년을 비는 뜻으로 농신(農神)에게 고사를 지낸 후 놀이판을 벌이는 것으로서 그 행사가 시작된다.  농악놀이를 중심으로 씨름판을 벌이기도 하고, 농사가 잘 된 집 머슴에게 삿갓을 씌워 소등에 태우고 마을을 돌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이런 이유로 호미씻기는 달리 장원례<壯元禮>라 불리기도 한다)하는 한편, 그 집주인은 온 동네 머슴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한편 농촌에서는 이 무렵 시장이 서서 이를 백종장(百種場)이라 부르며, 장터에서는 사당패들의 사당놀이며 또한 씨름판이 벌어지게도 된다. 

  이렇듯의 호미씻기 행사, 이는 말 그대로 한여름 밤 축제이며 하층민들 민중의 축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의 행사인 밀양 백중놀이를 살펴보게 되면 우리는 그 속에서 민중들의 애환을, 그리고 마치 안동 하회탈춤에서나 볼 수 있는 민중 카타르시스적 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억눌렸던 감성의 표출이며, 그럼에도 되풀이되는 민중적 계급질서 속에 그들 농부들이며 머슴들은 영원한 프로메테우스적 삶을 무던히 고집해야 했는가?

  V. 시간이 흐르면 영원도 흘러    

  이제 호미씻기의 여흥도, 그 남은 이야기도 시들해 갈 무렵, 차차 논에는 벼이삭들 여물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농부들은 마치 자신들 군상이라도 조성하듯, 누렇게 타오르는 들판에 서서 허수아비를 일으켜 세운다.  아니, 차라리 허수아비가 되어 팔뚝에는 참새 한 마리 얹어 둔 채 자연과 벗하여 선다.  그리고 10월 김장을 위해 무며 배추 심는 석양의 농부들 얼굴에서 우리는 밀레의 만종(晩鐘)을 생각할 수 있는가?

  아 시간이 흐르면 영원도 흐르는데, 그 흐르는 영원 속에 '영원의 나그네'는 그 흐름 멈춰 대지(大地)에 서는가!  아니다.  '흐름'은 무한한 흐름을 지향할 뿐, 흐름을 흘러 흐름 속에 잠긴다.  그리고 나그네는 남는다, 하늘 저켠의 노을을 바라본다.  휘황찬 붉음 가득 머금은 채....  그러면 길가에 또다시 코스모스 피고, 고추잠자리 숙연한 눈망울에 하루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