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목련꽃 그늘진 창가에서

정각스님·원각사 주지

  목련꽃 그늘에서

  산에는 두견새 울고, 진달래 만발한 자그마한 동산을 넘는다. 또 다시 하늘에 종달새 짖어대면 버들가지 꺾어 피리 만들고 삑- 삑- 불어대는 아이들. 뽕잎 따서 누에치는 산밑 농가의 풍경은 오히려 정겨워, 누가 그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는가.

  사월의 산에는 뭇 생명이 피어난다. 차가운 기운 온전히 가신 시골 녘 들길 따라 짤랑이는 소 방울 소리, 덜커덕거리는 우마차의 다가옴에 음매!- 소 울음 어우러지면 더욱 좋을 것이다. 혹여나 우편배달부 행낭 가득 정겨운 소식 전해 주면 집안 목련꽃 그늘에 엎드린 채 사랑의 편지를 읽음 또한 기쁜 일이다.

  풀잎 속에 사랑을

  산 녘의 오솔길, 도심의 한적한 길, 페이브먼트를 걷는 것도 한층 멋있는 일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 우리 삶의 여정 속에 지나치는 많은 행로들, 그 길에서 우리는 사랑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한적한 주말 오후. 서울역 대합실의 소란함 속에서 조차 생동감을 맛보며, 경춘선 기차 타고 인적 없는 강촌(江村) 역에 내린 채 그 기나긴 다리를 건너 보았는가? 강 건너 물 옆 비탈에 내려선 채 멀리 지나는 기차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쳐다봄은 삶의 질서 속에 숨겨진 사랑을 눈뜨게 한다.

  주택가 콘크리트 길 녘에 피어난 풀잎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발견한다. 아니 내면의 기쁨을 찾는 것이며, 혜화동 모퉁이의 카페 데미안에 들러 뜨거운 커피 마셨음이 오랜 일일 지라도 그 역시 내 마음에는 크나큰 향수(鄕愁)로서 남는다.

  삼월 삼짇날 풍경

  음력 3월 3일은 삼짇날, 춘색(春色) 완연하고 강남 갔던 제비 돌아오는 때이기도 하다. 흔히 숫자에도 음·양의 구분이 있어 양(陽)의 기수(基數)들이 겹치는 날, 3월 3일·5월 5일·7월 7일·9월 9일 등을 중양절(重陽節)이라 부르는데, 특히 3월 3일은 중삼절(重三節)이거나 삼짇날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날 사람들은 떡을 만든다. 산천(山川)에 널려진 진달래 따다 찹쌀가루와 반죽해 기름에 지지는 것으로, 이를 화전(花煎)이라 부른다. 또한 진달래꽃 녹두가루를 반죽해 국수 만들고 오미자 국물에 꿀과 잣을 곁들인 화면(花麵)을 만들기도 한다.

  이 때 진달래꽃 붉은 색은 양(陽)의 기운 무르익었음을 말해 준다. 겨울잠 지새운 뱀들도 머리 들어 나오고 강남 간 제비 돌아오는 날, 오곡(五穀)을 살찌우게 한다 하여 ‘오곡풍둥이’라 불리는 제비가 우리 머리 위를 날 때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노랑나비 흰나비 보면 좋은 일 생긴다고 말한다.

  또한 이 날, 사람들은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에 몸을 씻는다. 겨울철 쑤어놓은 메주로는 장 담그고, 약물을 마신다면 연중 무병(無病)할 것이다. 한편 이 날로부터 사월 초파일까지 아낙네들은 몸가짐을 정숙히 하며 우담(牛潭)의 동서 용왕당(龍王堂)과 삼신당(三神堂)을 찾아 아들을 낳게 해 달라 정성을 올린다.

(지방에 따라 이 날 장승제<長生祭>가 베풀어지기도 한다. 하늘 세계 관장하는 천하대장군과 땅 밑 세계 다스리는 지하여장군 등 장승은 각각 三神 및 산신의 수호신으로, 그들은 3월이 되면 땅에 내려와 10월에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어진다. 한편 장승제는 남근 숭배사상과도 연관되어 있다. 모든 생명이 그 빛을 발하는 때, 죽음의 겨울을 넘어 또 다시 삶을 찾게 되는 순간 수목의 되살아남과 같이 자손들 번성을 기원하는 이러한 의식은 아도니스 adonis 신앙의 또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桓은 생명의 나무이다. 亘은 且의 변형으로, 『설문해자』에 의하면 且는 남근의 상징으로 쓰여지고 있다. 즉 桓, 장승은 생명[亘]의 나무[木]를 의미한다.)

  또 다시 찾아드는 청명(淸明)과 한식(寒食)일에

  못자리 마련하는 곡우일에…

  ‘3월은 모춘(暮春)이요, 청명(淸明) 곡우(穀雨) 절기로다…’

 「농가월령가」의 말대로 곡우(穀雨)는 음력 3월에 들어 있다. 이 날 나라에서는 농가에 볍씨를 나누어주며, 못자리를 권장한다. 이제부터 농가의 일손은 바빠진다. 논밭 두럭을 수리하는 한편, 가래질이며 쟁기질, 그리고 전체 논의 10분의 1 정도를 따로 내어 못자리를 만든다.

  여기서 못자리란 온실이다. 우리에 있어 유치원이며 미술학원이 이에 해당된다. 갓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모의 크나큰 정성이 쏟아져야 하듯 이 못자리에도 농부의 포근한 애정이 깃들어야 한다. 이렇듯 성장을 위한 토대를 가꾸어 가는 농부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질서를 염원하는 내면의 희망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진달래 머리에 꽂고

  사월이 찾아옴에 이렇듯 여러 이야기들 생겨난다. 그럼에도 사월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과하주(過夏酒)를 들 수 있다. 말 그대로 무더운 여름을 지내기에 필요한 술로서, 그 이름 또한 다양하다. 소국주(小麴酒)·두견주(杜鵑酒)·도화주(桃花酒)·송순주(松荀酒), 평안도의 감흥로와 벽향주, 황해도의 이강주, 충청도의 노산주, 호남의 죽력고며 계당주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종류의 술을 담고자 사람들은 산이며 들로 나서 진달래, 솔가지, 복숭아꽃이며 두견화 등을 딴다. 그러는 동시 끼리끼리 모여 놀이를 즐기는데, 이것을 ‘화류(花柳)놀이’라 부른다. 이 때 산 녘을 거닐며 한 움큼 진달래 꺾어 머리에 꽂아도 좋다. 그리고 버들피리 멋들어지게 불어제끼며, 아이들은 질경이를 뜯어 서로 상대방의 풀을 끊어내는 ‘풀 싸움’을 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우리의 사랑 싣고서 봄은 지나간다… 아마 몇 그루 남은 목련의 하얀 꽃잎 조차 불그스레 시들어갈 때, 우리 아쉬움의 창가에 서면 화려했던 나의 봄을 몽상키도 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금 주변의 산은 온통 초록으로 물들 것임을…

 1990년 통도사 월간지 <등불>에 실었던 글임.